[명곡은 시대다] ‘트로트 리얼리즘’이 그려낸 가장 높은 봉우리... ⑪ 나훈아의 ‘물레


 
나훈아는 ‘트로트 지존’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는 톱스타다. 2006년 데뷔 40주년 공연을 끝으로 칩거하며 두문불출했던 나훈아는 지난해 새 음반을 발표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사진은 2005년 추석을 맞아 MBC가 내보낸 특집 프로그램 ‘나훈아의 아리수’에서 열정적인 무대를 보여주고 있는 나훈아. MBC 제공





격동의 해가 아닌 연도는 아마도 없을 테지만 1972년 역시 영국 낙하산부대가 북아일랜드 공화주의자들을 상대로 자행한 ‘피의 일요일’ 사건으로 어둡게 시작됐다. 여름엔 팔레스타인 테러 단체인 검은 9월단이 서독 뮌헨올림픽에 참가하고 있던 이스라엘 선수단을 인질로 잡고 전원을 살해하는 이른바 ‘검은 9월’ 사건을 일으켰다. 이 인질극과 진압 과정은 세계로 생중계돼 테러리즘의 현장이 세계에 알려지는 첫 번째 사건이 됐다.

1972년 뮌헨올림픽 참사 두 달 전, 남북한 당국은 7·4 공동성명을 발표해 한국전쟁 이후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의 3대 통일 원칙에 합의했다. 북한 특수공작원에 의한 1·21 사태 등 무력 도발이 국지적으로 자행되던 당시 상황을 보자면 이 공동성명은 한반도 평화를 향한 가히 혁명적인 정세 전환 같아 보였다.

그러나 이 성명이 위기에 처한 남북한 권력자들의 국면 타개용 ‘정치쇼’였음이 드러나는 데는 1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나중에 미국 중앙정보국(CIA) 비밀 보고서에서도 드러나듯이 박정희 정권이 대화에 임한 이유는 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북한의 의도를 일시적으로 저지하려는 것이었다. 공동성명 이후 정상회담을 할 의향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실제로 박정희 정권은 그해 가을 10월 유신을 감행해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헌정을 파괴하며 사실상의 영구 집권 의도를 드러냈다. 북한 역시 12월에 주체사상을 국시로 하는 사회주의 헌법을 통과시켜 김일성 체제의 공고화를 추진했다.

이때의 상황과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10월 17일 박정희는 국회 해산 및 정치활동 금지와 비상계엄령의 즉각적인 실시를 담은 대통령 특별 선언을 발표한다. 그리고 11일 뒤 한태연 갈봉근 같은 헌법학자들과 젊은 검사 김기춘 등이 초안을 만든 헌법 개정안이 국회를 대신한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공고되고 11월 21일 국민투표에 부쳐진다.

그 내용은 지금 보아도 상상을 초월한다.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기만적인 조직을 통해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겠다는 것, 대통령 임기는 6년이며 연임 제한은 없다는 것, 대통령에게 헌법 효력까지 일시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부여하겠다는 것, 국회의원의 3분의 1을 대통령 추천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회해산권 및 모든 법관의 임명권을 대통령이 갖도록 해 대통령이 3권 위에 군림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가히 총통을 넘어 황제의 지위나 다름없는 권력을 박정희 스스로에게 부여했던 것이다. 12월 15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선거가 실시돼 2359명의 대의원이 선출됐고, 12월 23일에는 박정희가 단독 입후보한 가운데 찬성 2357표, 무효 2표라는 비극적인 코미디를 연출하며 제4공화국 시대가 개막한다.

71년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이듬해 10월 유신까지 한국 사회는 급격하게 재편되고 있었다. 공업화와 도시화로 요약되는 위로부터의 경제 개혁은 저곡가 정책의 강행으로 농촌 공동체를 붕괴시켜 도시로 값싼 노동력을 공급했다. 빈부 격차도 날로 벌어져 갔다. 70년 겨울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과, 서울 빈민촌의 강제 이주로 빚어진 폭동인 광주 대단지(지금의 성남시 중원구와 수정구) 사건은 70년대 박정희 시대의 어두운 초상화다.

가요계의 전설이 된 라이벌… 남진 vs 나훈아

트윈 폴리오의 등장 이후 대학생들과 고등학생들에게 날로 인기를 얻어가던 통기타 음악과 로큰롤은 아직 캠퍼스와 심야 FM 라디오, 그리고 뮤직홀의 영토 안에 머물러 있었다. 주류 음악시장은 여전히 미8군 무대 스타일의 팝과 트로트가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72년 당시 한국 대중음악계 스타덤의 상징은 남진-나훈아 라이벌 대결이었다. 이 라이벌전은 식민지 시대 박인수-백년설의 전설적인 라이벌전 이래 두 번째 일어난 빅뱅이었다. 그 후로도 이를 능가할 파괴력을 지닌 라이벌 구도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특히 72년 서울시민회관에서 있었던 나훈아 리사이틀 공연 중에 남진 팬을 자처하던 남자가 무대로 난입해 ‘찻집의 고독’을 부르던 나훈아에게 흉기를 휘둘러 중상을 입힌 ‘팬 테러’ 사건은 두 사람의 팬클럽 간에 존재했던 일촉즉발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또한 이해는 두 거물이 토해낸 숱한 히트곡 중에서도 전설적인 대표작들을 낳은 해이기도 하다. 67년 ‘가슴 아프게’의 성공 이후 ‘가요계의 젊은 황제’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해 온 남진은 생애의 히트곡 ‘님과 함께’를 선보이며 전국을 열광시켰다.

특히 그가 이 노래와 함께 코디네이션한 엘비스 프레슬리 스타일의 화이트 판탈롱 패션은 그의 권위를 더욱 화려하게 연출했다. 실제로 그는 목포 최고 부호의 둘째 아들답게 누가 봐도 한눈에 반할 만큼 호남이었고 연기력도 뛰어났다. 남진은 67년 영화 ‘가슴 아프게’와 ‘그리움은 가슴마다’의 성공 이후 스크린에서도 주연급 배우로 손색없었던 까닭에 68년엔 무려 14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게다가 해병대 청룡부대원으로 입소해 베트남전쟁까지 참전했으니 요샛말로 하면 ‘엄친아’였던 것이다.

팝 스타일의 노래로 데뷔했다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정통 트로트 곡으로 스타덤에 오른 뒤 다시 팝 스타일까지 장악한 남진의 예술적 스펙트럼은 광활했고 팬층 또한 넓었다. 당시의 남진 팬들을 두고 언론은 ‘기성부대(奇聲部隊)’, 곧 기이한 소리를 내지르는 팬들이라고 묘사했는데 이것은 아마도 ‘오빠부대’의 원조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모든 화려함이 ‘님과 함께’에 요약돼 있다. ‘님과 함께’와 ‘물레방아 도는데’엔 나란히 시골의 풍경이 등장한다. 하지만 남진의 노래에 등장하는 시골은 ‘사랑하는 우리 님과 한평생 살고 싶은’ 우아하고 풍요로운 전원이다. 21세기 대한민국 중산층도 꿈에서나 희망하는 바로 그 풍요의 미래를 72년의 남진은 공상과학(SF)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리에게 펼쳐 보였다. 여기엔 해체되고 망가진 당시 농촌의 피폐함도 없고,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으며 저임금에 시달리던 노동자 및 빈민의 고통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박정희정부가 마약처럼 내민 ‘수출 100억불,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고지만 넘어서면 누구나 여유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던 그 연장선에 이 노래는 정확히 위치했던 것이다.

박정희가 제시한 환상을 대중은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오늘 노동의 고됨을 미래의 풍요로움으로 보상받으리란 기대에 부풀었다. 그러나 그 기대가 얼마나 헛된 것인지 증빙되는 데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묵직하고 절절한 현실의 노래

‘물레방아 도는데’는 정두수가 작사하고 박춘석이 작곡한 정통 트로트다. 부산 출신의 나훈아는 오로지 트로트에 집중했고 그만의 카리스마를 독보적으로 완성했으며 마침내 트로트의 황제가 됐다. 남진의 팬들은 넓게 포진했지만 나훈아의 팬층은 깊게 그를 지지했다.

70년대 중반까지 나훈아는 (그의 열렬한 팬들에게는 죄송한 얘기지만) 남진에게 밀려 2인자 자리에 머물렀다. 이 둘의 운명은 조용필이라는 새로운 가왕에게 권좌를 물려준 80년대에 가서야 갈린다. 신비주의를 고수한 나훈아는 다양하고 공개적인 활동으로 자신의 가치를 감가상각시킨 남진을 누르고 비록 트로트라는 영토에서나마 영구집권에 성공했던 것이다.

어쨌든 72년의 이 걸작은 작사가 정두수가 일제강점기 말 강제징집으로 만주전선에 끌려가 전사한 삼촌과의 이별을 떠올리며 쓴 작품이었다. 하지만 72년의 대한민국에서 ‘징검다리 건너갈 때 뒤돌아보며 서울로 떠나간 사람’은 다녀오겠다면서 서울로 갔다가 다시는 고향 땅을 밟지 못하고 있는 실향민이거나, 공장에서 일하느라 명절에도 고향 집에 가지 못하고 철야로 일해야 했던 도시 노동자였다고 할 수 있다.

작사가의 의도와는 달리 이 절제된 노랫말은 72년 대한민국 마이너리티에게 자신에게 드리워져 있던 짙은 현실주의적 상상력을 촉발시켰다. 흥겹고 단순하며 인상적인 리프를 탑재하고 있는 ‘님과 함께’가 세대를 초월해 히트를 거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레방아 도는데’ 또한 차트의 톱에 오르긴 했지만 ‘님과 함께’가 만들어낸 파괴력에 근접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님과 함께’가 상쾌한 여름밤의 꿈과 같은 신기루가 돼 흩어졌다면 ‘물레방아 도는데’는 묵직하고 절절한 현실의 노래가 돼 가슴속 깊이 박혔다.

60년대부터 한국 대중음악을 지배해 온 미국 스타일의 스탠더드 팝과 정통 트로트는 이 두 노래를 극점으로 서서히 하강하기 시작해 이듬해인 73년부터는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감수성에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 통기타 계열이 낳은 송창식과 이장희, 그리고 김정호와 김세환 이수만 등이 다양한 개성을 앞세워 차트를 점령하게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절치부심한 ‘한국 록의 아버지’ 신중현도 마침내 사자후를 터트릴 예정이었다. 물론 이들의 봉기는 박정희 정권의 군홧발에 삼일천하를 넘기지 못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사족 하나. 72년 그해 노벨 평화상은 아무에게도 수상의 영광을 안겨주지 않았다.

▒ 나훈아(1947∼)

본명은 최홍기. 부산에서 태어난 그는 서울 유학 중이던 고등학교 2학년 때 오아시스 레코드사를 통해 ‘천리길’로 데뷔했다. 1968년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 히트하면서 남진, 배호와 더불어 트로트 트로이카를 이루며 한국 트로트계의 ‘대세’가 됐다.

70년대 말에는 은둔했으나 81년 ‘대동강 편지’로 컴백했다. 이후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능력까지 겸비해 전성기 못지않은 히트곡을 만들어내면서 오랜 2인자 생활을 청산하고 트로트계의 전설이 됐다. 극한적인 자기 관리와 완벽한 콘서트 라이브 능력으로 수많은 스캔들의 난관을 극복하며 올해만 하더라도 전국 투어를 10분 안에 매진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2006년 노래방 반주기 업체의 집계에 의하면 나훈아는 노래방 수록곡(153곡)이 가장 많은 가수로 선정되기도 했다.

강헌<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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