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것 같이 사랑해서 결혼했다가 죽일 것 같은 원수가 되어 산다.”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아는 와이프’에서 나온 대사는 많은 이들의 공감을 샀다. 맞벌이 부부의 현실을 고스란히 담은 이 드라마의 주인공들은 아내, 남편 할 것 없이 팍팍한 현실에 지쳐 있다. 기혼 여성이 주로 활동하는 ‘맘카페’에서는 이런 사례들이 넘쳐난다. “육아가 너무 힘들다” “맞벌이하는데 나만 독박육아 한다” “회사에서 대놓고 나가라는데 생계형이라 버티고 있다” “재취업이 될까?” 등의 고민이 이어진다. 기혼 남성들이 많은 커뮤니티에도 불만은 차고 넘친다. “집밥을 먹은 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 난다” “회사에선 회식 안 간다고 난리고 집에선 일찍 안 온다고 난리고…” “다음 생엔 ATM기로 태어나고 싶다” 등의 한탄이 이어진다. 이들도 처음엔 행복한 결혼을 꿈꿨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어떤가. ‘아는 와이프’ 남자 주인공은 밤마다 헤어지기 싫어 결혼했지만 5년 만에 “웬 괴물 하나와 침대를 쓰고 있다”고 고백했다. “회사보다 집이 더 지치고 고객보다 마누라 상대하는 게 더 어렵다”고도 했다. 이런 불행의 원인은 무엇일까.
출근지각보다 무서운 퇴근지각
“어린이집 선생님은 죽어라고 전화하지. 남편은 죽어라 안 받지. 손님들은 벌써 들이닥쳤지. 대체 나더러 어쩌라고. 애들은 나 혼자 낳았어. 왜 나만 독박 써야 되는 건데?” ‘아는 와이프’ 여주인공의 분노에 찬 절규는 설문조사 결과로 입증된다. 취업 포털 사이트 잡코리아가 자녀가 있는 맞벌이 남녀 507명을 대상으로 육아와 가사 분담에 대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직장맘 10명중 3명(30.6%)이 독박육아 중이라고 답했다. 그러나 아내가 독박육아를 하는 것 같으냐는 질문에 ‘그렇다’는 남편의 응답은 16.1%에 불과했다. 자녀를 돌보는 시간의 차이도 ‘독박육아’를 입증한다. ‘2017년 저출산·고령화에 대한 국민 인식조사’ 결과 초등학교 미만 자녀를 둔 부모가 평일에 아이를 돌보는 시간을 살펴보면 남편은 평균 45.5분인 반면 아내는 5배에 이르는 229.2분이다. 휴일에도 남편(145.7분)은 아내(297.6분)의 절반에 불과하다. 이처럼 직장맘들은 일과 육아, 가사 노동에 매일이 지친다.
자아실현?… 나는 생계형 워킹맘
초등학교 1학년과 7살 유치원생 자녀를 둔 이윤미(가명·41)씨는 작심하고 육아휴직을 했지만 6개월도 채 쓰지 못하고 복직했다. 이씨는 육아휴직수당 최고 금액을 받고 있지만 자신이 받던 월급의 절반도 되지 않아 생활을 꾸리기 어려웠다. 매달 나가는 주택자금 대출 이자와 보험료, 각종 공과금에 아이 교육비까지 더하면 매달 마이너스를 면치 못한다. 이씨는 복직 직전 맘카페에 “시간이 있으니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는 게 현실”이라며 “생계형 워킹맘이기 때문에 결국 복직하기로 했다”는 하소연을 올렸다. 많은 사람이 자신도 마찬가지라며 동조했다. 지난해 취업 포털 사이트 잡코리아가 2030 남녀 직장인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맞벌이하는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56.5%)였다.
맞벌이 가정에 감춰진 함정
이 같은 생계형 맞벌이 가정이 대부분이지만 여기엔 함정이 있다. 버는 것보다 쓰는 게 많다는 것이다. 은행 전산팀에서 근무하는 강민정(가명·40)씨는 최근 퇴사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급여가 적은 건 아니지만 잦은 야근에 육아 도우미에 들어가는 비용이 크기 때문이다. 정부 사업으로 운영되는 아이돌보미활동수당을 기준으로 1명의 아이를 돌보는 데 드는 시급은 7800원이다.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9시간이면 7만200원, 여기에 출퇴근시간을 추가해 야간시급으로 적용하면 하루에 9만3600원이 든다. 주 5일이면 46만8000원, 4주면 187만2000원이다. 자녀 1인당 들어가는 베이비시터 비용은 월 200만원인 셈이다. 강씨는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엄마 손이 필요 없을 때를 생각해 버티는 데까지 버티고 있지만 힘이 빠진다”며 “돈을 버는 것도 안 버는 것도 아닌, 마치 사회에 환원하기 위해 경제활동을 하는 것 같다”고 한탄했다.
외벌이 해도 맞벌이 해도 불행한 남편
그렇다면 남편들은 어떨까. 외벌이 남편들은 경제적인 부담감을 심심찮게 호소한다. ‘나 혼자 번다’ ‘88만원 가족’ 등의 신조어까지 나올 정도다. ‘88만원 가족’ 속엔 고정 지출을 제외하면 88만원으로 한 달을 살아야 한다는 한탄이 담겼다. 때문에 이들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 때문에 맞벌이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말한다. 그러나 맞벌이 가정의 남편들이 우울감을 느낀다는 조사 결과는 또 다른 고민을 내포하고 있다. 2년 전 연세대 의대 윤진하, 서울대 의대 강모열 교수팀이 2007∼2012년 국민건강영양 조사에 참여한 부부 1만6112명을 선정해 배우자 근무시간에 따른 우울 정도를 분석한 결과 아내의 근무시간이 길수록 남편의 우울감이 늘어나는 것으로 조사됐다. 아내가 무직일 때 우울감을 느끼는 남편은 7.1%에 불과한 반면 아내의 근무시간이 주 40시간 미만이면 10.7%, 주 50시간 이상에서 60시간 미만이면 11.0%, 주 60시간 이상이면 13%로 뛰었다.
취업 못한 자녀에 노부모까지 ‘더블케어’
자녀가 커서 육아 부담이 줄면 행복할까. 중년 부부들은 나이든 부모에 다 큰 자녀까지 돌봐야 하는 현실에 봉착해 있다. 이를 ‘더블케어’라고 한다. 노부모 봉양은 아이를 키울 때와 마찬가지로 돈과 노동력이 필요하다. 게다가 극심한 청년실업난에 자녀로 인한 경제적 부담은 여전하다. 미래에셋 은퇴연구소가 지난해 12월 50∼69세 남녀 2001명을 조사한 결과 성인 자녀와 노부모를 동시에 부양하는 ‘더블케어’ 중인 가구가 무려 34.5%인 것으로 나타났다. 성인 자녀에게 주는 생활비는 월 78만원, 노부모에게 지출하는 돈은 40만원으로 매월 118만원이 고정적으로 나간다. 월평균 소득 579만원의 20.4%에 달하는 수준이다. 노부모를 병간호하는 경우에는 노부모에게 40만원, 병간호비 55만원으로 지출 금액이 배로 는다. 결국 60대가 돼서도 경제활동을 멈출 수 없다.
결혼을 권하지 못하는 이유
이런 상황 때문에 맘카페를 비롯해 많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다시 태어나면 결혼이나 출산은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많다. 맞벌이 가정은 육아 문제, 외벌이 부부는 경제 문제, 중년부부는 부모 문제로 고민하다 한평생 끝난다는 한탄이 이어진다. 아이를 마음 편히 맡길 곳이 없어 불안하다는 의견도 많다. 하루가 멀다 하고 발생하는 아동학대 사건과 아이가 아파도 쉴 수 없는 근무 환경 탓이다. 때문에 저출산 정책을 발표할 때마다 보육시설에 주는 정부지원금을 가정에 직접 지원해 선택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댓글도 심심치 않게 달린다. 외벌이만으로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을 만들어 달라는 뜻이다. 아이를 낳아 키우기 위해선 돈과 시간이 모두 필요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수천 건에 이르는 저출산·고령화 정책에도 1.05명이라는 역대 최악의 출산율을 경신했다는 건 이 딜레마를 아직 해결하지 못한 것을 방증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결혼을 권하지 않는 게 아니라 권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천금주 기자 juju79@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