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역세포와 암세포가 결합하는 길목 차단 항암 효과내는 원리
몸의 면역 기능 조절로 암을 없애
1·2세대 암 치료제와 달리 부작용·내성 문제 크게 줄이고 다양한 암종에서 효과 기대
한국인이 많은 폐암에 탁월, 국내 제약사들도 연구개발에 진력… 임상시험 승인 건수 크게 늘어
모든 환자에 효과 있는 것 아닌데다 값도 비싸 풀어야 할 숙제도 많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2015년 91세에 피부암의 일종인 악성 흑색종 진단을 받았다. 암이 뇌까지 퍼져 생존 확률이 극히 낮았다. 그런데 면역 항암제(키트루다)가 그에게 생명의 불씨를 살렸다. 방사선 치료와 함께 키트루다 투여 4개월 만에 암과 뇌전이가 깨끗이 사라졌고, 완치 판정을 받아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다.
지난해 폐암(비소세포폐암) 4기를 진단받은 80대 남성 A씨는 일반 항암제나 방사선 치료를 거치지 않고 첫 치료부터 키트루다를 썼다. 검사 결과 면역 항암제가 잘 듣는 유형이었기 때문이다. 암세포에서 특징적으로 발현되는 단백질(PD-L1)이 100%로 나왔던 것. A씨는 약 10사이클의 치료(3주에 1회 투여)만에 암 크기가 3.5㎝에서 1.3㎝로 60% 이상 줄었고 귀로 전이됐던 암도 모두 없어졌다. 그는 지금까지 일상생활에 큰 불편함 없이 지내고 있다.
카터 전 대통령과 A씨를 죽음의 문턱에서 살린 것은 면역 항암제였다. 차세대 암치료법으로 주목받는 면역 항암제 개발의 주춧돌을 놓은 의학자 2명이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제임스 P 앨리슨 미국 텍사스의대 MD앤드슨암센터 교수와 혼조 다스쿠 일본 교토대 명예교수다. 둘 다 암세포를 공격하는 인체 면역 시스템 원리를 활용해 암 치료의 패러다임 변화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앨리슨 교수는 면역체계에서 제동장치 역할을 하는 단백질(CTLA-4)을 연구했고 CTLA-4와 결합해 그 기능을 차단하는 항체 개발을 주도했다. 그의 연구는 세계 첫 면역 항암제인 ‘여보이(성분명 이필리무맙)’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여보이는 2011년 미국 식품의약국(FDA)으로부터 악성 흑색종 치료제로 처음 허가받았다. 혼조 교수는 몸속 면역세포인 T세포의 표면에 발현된 PD-1 단백질을 처음 발견했다. 그의 연구를 바탕으로 암세포와 PD-1 단백질의 결합을 차단하는 면역 항암제 ‘키트루다(펨브롤리주맙)’와 ‘옵디보(니볼루맙)’가 개발됐다.
두 의학자의 노력으로 세상에 빛을 본 면역 항암제는 지금까지의 임상 연구 결과만 보면 인류의 오랜 숙제인 ‘암 정복’에 한발 더 성큼 다가서게 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하지만 아직 넘어야 할 산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암치료 새 패러다임 제시
암 치료 패러다임은 10년 주기로 변화돼 왔다. 1990년대 암 치료의 주류를 이뤘던 1세대 화학항암제는 정상세포보다 분화 속도가 빠른 암세포를 죽이기 위해 개발됐다. 하지만 암세포뿐 아니라 정상세포까지 무작위로 공격해 탈모와 구토 등 부작용과 합병증을 초래한다는 단점이 있다.
90년대 말 등장한 2세대 표적 항암제는 특정 유전자 돌연변이(폐암의 EGFR, ALK 등)가 있는 암세포만을 집중 공격해 부작용을 줄이고 치료 효과를 높였다. 다만 특정 유전자 변이가 있는 환자들만 치료할 수 있고 내성이 생기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 두 치료제의 단점을 보완한 게 3세대 항암치료인 면역 항암제다. 2010년대 들어 기존 암 치료법의 대안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종양내과 조병철 교수는 8일 “2010년 이전에도 암 환자의 면역력을 증가시키는 전략으로 면역물질인 사이토카인 증강 요법, 암 치료 백신 투여, 면역세포인 T세포 자체를 투여하는 등의 방법이 시도됐지만 수십년간 아주 일부 암 외에는 고무적인 연구 성과를 얻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근 암세포로 인해 억제된 몸의 면역체계를 되살려주는 면역 항암제가 개발되고 긍정적 치료 효과가 속속 보고되면서 면역 항암 치료가 재조명받고 있다”고 말했다.
면역 항암제의 정확한 의학용어는 ‘면역 관문 억제제(immune checkpoint inhibitor)’다. 면역 관문은 면역세포와 암세포가 결합하는 ‘길목’을 말한다. 면역 항암제는 이 길목을 차단해 항암 효과를 낸다. 두 명의 노벨의학상 수상자가 발견한 PD-1과 CTLA-4가 바로 면역 관문에 관여하는 인자들이다.
작동 원리는 이렇다. 인체의 면역체계는 기존에 없던 새 물질이 들어오면 이를 없애기 위해 다양한 방법으로 공격한다. 하지만 암세포는 면역세포(T세포)의 기능을 억제하는 특정 단백질을 분비해 면역 시스템의 공격을 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암세포에서 나오는 ‘PD-L1’이라는 단백질이 면역세포의 ‘PD-1’ 단백질(수용체)과 결합하면 면역세포가 암세포를 인지하지 못해 공격하지 않게 된다. 즉, 우리 몸의 경찰(면역세포)은 도둑(암세포)을 잡는 역할을 하는데, 도둑이 PD-L1이라는 가면을 쓰고 위장을 하면 경찰이 도둑인지 아닌지 알지 못하는 것. 한마디로 암세포가 면역세포를 속이는 셈이다.
서울아산병원 종양내과 이대호 교수는 “면역 항암제는 면역세포의 PD-1과 암세포의 PD-L1 결합을 막아 암세포가 이런 속임수를 쓰지 못하게 함으로써 면역세포의 암세포 공격을 유도한다”며 “원래 갖고 있는 우리 몸의 면역 기능을 조절해 암을 없애기 때문에 기존 치료제가 갖지 못한 장점이 많다”고 말했다.
부작용이 상대적으로 적고 특정 암이 아니라 다양한 암종에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이 교수는 “특히 면역세포는 ‘기억 기능’을 갖고 있어 치료제를 끊어도 지속적인 효과를 볼 수 있다”며 “장기 생존이나 암 완치까지 기대할 수 있다”고 했다.
면역 항암제는 처음에는 치료 대상이 악성 흑색종뿐이었지만 지금은 폐암 방광암 두경부암 신장암 림프종 위암 등 7개 암종으로 넓혀졌다. 국내에는 키트루다와 옵디보, 티센트릭 3종류가 허가돼 쓰이고 있다. 다만 아직 2차 치료제로 쓰이거나 일부 진행성(말기) 암에만 건강보험이 적용돼 건보 확대를 통한 환자 치료비 부담을 덜어줄 필요성이 제기된다.
폐암, 장기 생존 가능성 확인
면역 항암제는 더 이상 치료법이 없는 말기 암 환자의 20∼30%에서, 기존 치료법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암들에도 효과가 나타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특히 국내 암 사망률 1위인 폐암에서 드라마틱한 효과가 보고됐다. 폐암은 초기 자각 증상이 거의 없어 말기에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면역 항암제 등장 전까지 폐암의 80%를 차지하는 비소세포폐암 중 ‘EGFR 또는 ALK 유전자 변이’가 없어 표적 항암제를 쓸 수 없는 말기 폐암 환자들의 경우 일반 화학항암제가 유일한 치료 옵션이었다. 일반 항암제는 전신 부작용을 동반하고 장기 생존율도 낮은 편이다. 2015년 국가암등록통계에 따르면 수술 치료가 불가능한 말기 폐암의 5년 생존율은 6.1%에 불과하다.
그런데 지난 6월 미국종양학회에 발표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진행성 비소세포폐암 진단 후 면역 항암제인 키트루다로 첫 치료(1차 치료)를 한 환자의 절반가량(48%)이 4년 후에도 생존한 것으로 나타났다. 완치로 판명되는 기간인 5년 가까이 생존한 셈이다.
또 일반 항암제 사용 환자의 생존 기간(평균 14.2개월)에 비해 면역 항암제 사용자의 생존 기간(평균 30개월)이 배 이상 연장됐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면역 항암제는 암세포에서의 PD-L1 단백질 발현율이 50% 이상일 경우 특히 치료 효과가 크다.
조병철 교수는 “면역 항암제들은 특정 유전자 변이 여부와 상관없이 여러 암종에서 공통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게 강점”이라고 말했다.
실제 키트루다의 경우 전 세계적으로 30여종 암에서 700여건의 임상시험이 진행 중이다. 박은정 국립암센터 면역치료연구과장은 “올해 노벨상을 받게 해준 ‘PD-1’이나 ‘CTLA-4’ 외에도 다양한 면역 관문 인자들(TIM-3, 4-1BB 등)을 발굴하고 향후 이를 타깃으로 한 면역 항암제 개발이 기대된다”며 “아울러 암세포를 공격할 수 있는 면역세포를 몸 밖에서 만들어 직접 투여하는 연구도 활발히 진행 중”이라고 했다.
그간 다국적 제약사들에 밀렸던 국내 제약사들도 면역 항암제 연구·개발(R&D)에 사활을 걸고 있다. 유한양행, 동아에스티, 보령제약, 제넥신, 신라젠 등이 뛰어들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면역항암제 임상시험 승인 건수는 89건으로 전년보다 30.9% 늘었다.
암 완치 향한 출발점
전문가들은 면역 항암제가 수술, 항암, 방사선으로 접근하지 못했던 암 치료에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한 건 맞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고 말한다.
우선 면역 항암제는 값이 비싸고 모든 환자에게서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는 게 한계로 꼽힌다. 약효가 나타날 만한 정확한 환자군을 선별해야 하는 것도 어려움이다. 면역 항암제가 개발되고 환자들에게 직접 투여한 게 얼마 되지 않은 만큼 좀 더 시간을 두고 부작용 등을 지켜봐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조 교수는 “면역 항암제가 완벽한 치료법이 된다고 지금으로선 장담할 수 없다. 암 완치를 향한 출발점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암을 완벽하게 치료하기 위해 앞으로 기존 치료와 병용 치료나 기존 치료법과의 치료 순서 결정 등이 중요한 숙제로 남아있다”고 강조했다.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