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기 없는 얼굴에 입술만 붉게 칠한 채 쪼그려 앉아 담배 한 대를 피워 물고 깊은숨을 내쉬는 노란 머리의 이 여자. 배우 한지민(36)의 파격적인 변신이다. 영화 ‘미쓰백’(감독 이지원)에서 시도한 강렬함 말이다. 특유의 맑고 순한 ‘천사 이미지’는 온데간데없다.
“이질감이 들진 않을까 걱정했어요. 그러면 영화 전체에 폐를 끼치게 되는 거니까요. 감정적인 부분을 많이 연구했죠. 인물이 하는 행동이나 손짓 하나까지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대중이 느끼는 어색함을 최대한 줄이는 게 숙제였죠.”
11일 개봉하는 ‘미쓰백’에서 한지민은 어린 시절 엄마(장영남)에게 학대받고 버려진 뒤 전과자가 되어 미쓰백이라는 가명으로 살아가는 백상아 역을 소화했다. 세상과 담을 쌓고 살던 그는 학대를 당하고 거리로 쫓겨난, 자신과 똑 닮은 소녀 지은(김시아)을 만나 본능적으로 손을 내민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한지민은 “시나리오를 새벽 4시쯤 읽었는데 감성적인 시간대라 그랬는지 유독 여운이 강했다”면서 “상아가 너무나 측은해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영화를 꼭 하고 싶었다. 기존의 내 이미지를 대단히 많이 바꿔야 하는 작업이라는 건 나중에야 깨달았다”고 미소를 지었다.
외적인 스타일링부터 신경을 썼다. 헤어와 메이크업, 의상까지 세심하게 설정했다. “작은 체구의 상아가 홀로 세상에 맞서, 마치 ‘나 건들지 마’라고 외치듯 괜히 센 척하는 느낌을 표현하고 싶었다”는 게 그의 말이다. 가죽재킷이나 호피무늬 코트 같은 강렬한 느낌의 의상을 고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세차장과 마사지 숍에서 일하는 상아의 거친 삶을 표현하기 위해 일부러 피부까지 망가뜨렸다. “제 피부가 건성이라 주름이 잘 생기는 편인데, 이번엔 도움이 됐어요. 로션을 안 바르면 바로 거칠해지더라고요. 안 하던 표정을 짓다 보니 미간에 주름도 생겼고요. 촬영을 마친 뒤에 피부과 치료 받으면서 복구를 했죠(웃음).”
영화가 언론에 공개된 후 ‘한지민의 인생작’이라는 호평이 심심찮게 흘러나온다. 연기 생활 15년 만에 맡은 첫 타이틀롤. ‘역린’(2014) ‘밀정’(2016) 등 영화에 출연했었으나 원톱 주연으로 나선 건 처음이다. 한지민은 “타이틀롤이라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됐다. 개봉이 다가올수록 그 무게감이 커진다”고 털어놨다.
“이미지가 망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었어요. 단지 연기적인 갈증이 컸죠. 새로운 걸 시도하고 싶었지만 열정보다 겁이 많았던 저에게, ‘미쓰백’은 운명 같은 작품이에요. 앞으로도 도전에 나설 때마다 (이 작품이) 용기를 북돋아줄 것 같아요.”
사실, 한지민이 이 영화 출연을 결정한 건 연기자로서의 커리어를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작품이 지닌 사회적 의미 때문이었다. 워낙 아이들을 좋아해 아동학대 문제에도 관심이 많다는 그는 “우리 사회가 더 발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강화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울여대 사회사업학과를 졸업한 그는 기부·나눔 활동에도 열심이다. 2007년부터 매년 어린이날과 크리스마스이브에 명동 거리로 나가 굶주린 어린이들을 위한 자선 모금 활동을 펼치고 있다. 유엔 국제구호단체 ‘조인투게더(한국 JTS)’ 등 어린이단체들을 후원하고 있기도 하다.
“혹여나 ‘보여주기 식’이 아니냐는 시선을 받을까 의식된 적도 있어요. 예전엔 사람들에게 다가가 ‘도와주세요’ 하는 것도 영 멋쩍었는데 이젠 10년 넘게 하다 보니 노하우가 생겼어요(웃음). 내가 외친 구호 한마디로 한 아이가 먹고살게 되니까요. 1년에 그 두 날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키는, 제 자신과의 약속이에요.”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