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LG, 고유 색깔도 지우고… ‘유럽 터줏대감’들과 한판







삼성전자·LG전자가 최고급 가전의 상징인 프리미엄 빌트인(built-in·붙박이) 가전 육성에 공을 들이고 있다. 20여년 준비 끝에 ‘꿈의 무대’인 유럽 프리미엄 빌트인 가전 시장에도 도전한다. 삼성·LG 색깔마저 지운 초프리미엄 브랜드를 앞세워 독일 밀레, 가게나우 등 유럽의 터줏대감들과 경쟁한다.

빌트인 가전은 주방의 벽면이나 가구에 딱 맞게 만든 가전제품을 말한다. 주로 가전을 가구 안으로 집어넣거나 가전 밖으로 돌출되지 않도록 만든다. 싱크대와 식탁 등 주방가구와 조화가 잘 되는, 간결하고 담백한 디자인이 선호된다.

한국에서는 빌트인 가전이 아파트나 오피스텔에 처음부터 설치돼 있는 가전으로 더 알려져 있다. 가전업체가 소비자가 아닌 건설사를 상대로 판매하는 기업 간 거래(B2B)용 가전이라는 인식이 짙다.

프리미엄 빌트인 가전의 가격은 상상 이상이다. 삼성전자·LG전자의 최고가 빌트인 브랜드의 경우 냉장고와 오븐, 와인보관기 등을 맞추는 데 5000만원 이상이 든다. 통상 빌트인 가전을 구매하는 이들은 주방가구까지 함께 맞추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경우 통상 1억5000만∼2억원이 필요하다.

가전 업체 입장에서 보면 프리미엄 빌트인 가전은 정체된 가전 시장의 몇 안 되는 돌파구다. 전 세계 빌트인 시장 규모는 약 50조원으로 추정된다. 이 가운데 초프리미엄 빌트인 가전이 약 15%를 차지하며 성장률도 일반 빌트인 시장보다 약 3배 높다. 밀레, 모노그램, 가게나우 등 유명 프리미엄 빌트인 브랜드가 이 시장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다.

일단 프리미엄 빌트인 가전 브랜드로 자리를 굳히면 ‘브랜드 낙수효과’가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최고급 가전 업체라는 이미지가 기존 제품으로까지 확산돼 전체 수익성이 올라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프리미엄 빌트인 가전을 꾸준히 출시하다보면 그보다 한 단계 급이 낮은 다른 제품이 덩달아 잘 팔린다. 1000만원이 넘는 값비싼 프리미엄 빌트인 냉장고를 보고 나면 200만원짜리 냉장고는 구매할 만하다고 느껴지는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프리미엄 빌트인 가전의 주 무대는 유럽이다. 최고급 빌트인 가구에 지갑을 여는 이들의 비율이 높아서다. 유럽인들은 비교적 한 주택에 오랫동안 머무르기 때문에 빌트인 가구·가전을 활용해 자기 취향대로 주방을 꾸미는 비중이 높다. 명품 브랜드에 대한 소비자들의 충성도가 높은 것도 프리미엄 빌트인 가전이 발달하게 된 요인이다.

이에 맞게 유럽에서 활동하는 프리미엄 빌트인 가전 업체의 역사는 화려하다. 가전이 태동한 지역답게 밀레(119년) 보쉬(132년) 일렉트로룩스(99년) 등이 100년 역사를, 가게나우(335년)는 300년 역사를 자랑한다. 이들은 전자장치 없이 전기·기계장치로 가전제품을 구동하던 시절부터 회사를 운영해 기술력이 높다. 내구성도 뛰어나 제품 고장이 드물다.

프리미엄 빌트인 시장의 고객군은 기존 가전시장 고객과는 구분된다. 미국은 프리미엄 빌트인 가전의 주 고객이 인테리어 디자인을 총괄하는 디자이너들이다. 이들은 최종 소비자를 대신해 전체 주방 디자인에 어울리는 가전을 고른다. 유럽은 가구 제조 업체가 시장을 좌우한다. 아무리 성능 좋은 가전이라도 가구와 어울리지 않으면 최종 선택을 받을 수 없다.

유럽 프리미엄 빌트인 시장은 신생 가전 업체가 진입하기 힘든 난공불락이다. 밀레, 가게나우에 비하면 후발주자에 해당하는 삼성전자와 LG전자 역시 진출에 애를 먹었다. 그동안 두 회사는 자체 고급 가전 브랜드인 ‘삼성 셰프컬렉션’과 ‘LG 디오스(LG 스튜디오)’를 앞세워 유럽의 문을 두드렸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에 삼성전자·LG전자는 삼성·LG 색깔을 지운 뒤 유럽 시장에 재도전하기로 전략을 바꿨다. 다만 시행 방식은 엇갈렸다. 삼성전자는 2016년 미국의 초프리미엄 빌트인 가전 브랜드 ‘데이코’를 인수해 브랜드 프리미엄화에 속도를 냈고, LG전자는 같은 해 초프리미엄 빌트인 가전 자체 브랜드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를 론칭했다.

양사가 프리미엄 빌트인 육성에 사활을 거는 모습은 지난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가전전시회(IFA)에서도 드러났다. 김현석 삼성전자 소비자가전(CE)부문장은 당시 기자간담회에서 “생활가전은 빌트인을 성공 못하면 성공했다고 할 수 없다”며 “유럽 시장이 굉장히 보수적이라 외국 브랜드들이 들어가기 힘들지만 꾸준히 오랫동안 노력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LG전자는 IFA에서 유럽에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를 공식 론칭했다. 또 900㎡ 야외 전시장에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 전용 전시관을 따로 구성해 최고급 가전들을 전시했다. LG전자는 명품 가구 브랜드 발쿠치네, 아클리니아 등과 협업해 모든 가전을 가구 안에 넣어 하나의 벽처럼 설계했다. 사람이 벽에 다가가면 가전 동작 버튼이 활성화되고 이 버튼을 누르면 가구 문이 열리면서 가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삼성전자도 자체 부스에 데이코 빌트인 가전을 전시하고 유럽 시장 진출을 본격화했다. 주방가구 전문 브랜드인 독일의 놀테, 이탈리아의 루베 등과 협력해 전시존을 꾸몄다. 냉장고 가격만 1800만원에 이르는 등 초고가 가전들이 설치됐다.

국내에서도 프리미엄 빌트인 가전 시장을 둘러싼 신경전이 치열하다. 삼성전자는 연말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 데이코 전시장을 열 예정이다. 앞서 LG전자가 지난해 8월 5㎞ 떨어진 논현동에 초고급 빌트인 가전 전시장 ‘시그니처 키친 스위트 논현쇼룸’을 열자 맞대응한 것이다.

국내 빌트인 가전 시장 규모는 유럽(20조원) 미국(5조원)에는 훨씬 못 미치는 1조원 수준으로 추산된다. 다만 성장 잠재력이 크다. 업계 관계자는 12일 “주방 리모델링 수요와 고급 주택단지가 꾸준히 늘면서 프리미엄 빌트인에 대한 기대치도 높아졌다”며 “앞으로는 디자인과 내구성은 물론 사물인터넷(IoT)과 인공지능(AI) 기술력도 프리미엄 빌트인 가전의 성패를 좌우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주환 기자 johnny@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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