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언제나 한결같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그런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와 인식을 자기개념(self-concept)이라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어떤 일을 잘 하는가. 가족과 사회에서의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에 따라 자기 개념이 다르게 구성된다. 다양한 역할과 관계를 경험하면서 내면에는 여러 가지 자기 개념이 자리 잡게 된다.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자기 개념들의 속성이 서로 모순적이고 이질적인 정도를 일컬어 자기복잡성(self-complexity)이라고 한다.
일처리가 꼼꼼하고 주장이 강한 직장인이 퇴근 후에 친구를 만나면 묵묵히 고민을 들어주고, 집에서는 아내에게 꼼짝 못하는 순한 양이 되었다가, 자녀를 훈육할 때는 호랑이 같은 아빠가 되기도 한다면 이 사람의 내면에는 완벽주의자, 푸근한 친구, 순종적인 남편, 호랑이 아빠라는 자기 개념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다. 언뜻 보면 서로 모순되는 속성들이 공존할 때 자기 복잡성이 커진다. 교수 직함을 가진 어떤 남자가 집에서도 자녀와 아내를 가르치려고만 하고, 취미 생활도 하지 않고 연구실에만 콕 박혀 있고, 자신을 대접해주지 않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으려고 하면 자기 복잡성은 줄어든다. 기혼 여성이 ‘나는 두 아이의 엄마다’라는 자기 개념에만 의존하지 않고 ‘나는 누구와도 잘 어울리고, 혼자 있을 때는 뜨개질을 하고,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남편보다 산을 더 잘 탄다’라고 자신의 특성과 역할을 다채롭게 규정하고 있다면, 자기 복잡성은 커진다.
스트레스가 넘쳐나는 현실에서 건강하게 버티려면 자기 정체성이 복잡해야 한다. 자기 복잡성이 큰 사람일수록 스트레스를 받아도 덜 괴로워지고, 우울증에 걸릴 위험도 낮다. 다양한 정체성이 모여 있으면 스트레스에 대한 완충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가 잘못돼도 다른 자기 개념들이 자신을 지탱해주는 것이다.
매일 밤늦게까지 일만 하고, 퇴근해서도 회사 일을 떨치지 못할 경우 자기 개념은 단조로워진다. ‘나’라는 사람이 ‘회사원 ○○○’으로 개념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직장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마다 쉽게 스트레스 받고 자존감도 금방 떨어진다.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회사원 ○○○’으로만 과도하게 융합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좋은 아빠(엄마)이자 남편(아내)이고, 직장 동료 말고도 친구가 많고, 일이 아니어도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취미도 있고, 쉬는 날에는 봉사 활동도 열심히 한다’라고 자아를 다양하게 분화시켜 놓으면 스트레스에 대한 저항력도 커진다.
토요일 밤에 클럽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새벽까지 춤을 추다가 일요일 아침엔 단정하게 옷을 갈아입고 경건한 마음으로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것도 자기 복잡성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언뜻 보면 ‘어떻게 저렇게 이중적일 수 있지’라며 의아해할 수도 있지만, 맥락에 맞춰 태도와 자세를 유연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는 건 마음이 건강하다는 증거다. 때론 화려하게 때론 단정하게 자기를 바꿀 수 있는 건 심리적으로 유연해야 가능하다.
몽테뉴도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두 여러 가지 색깔로 이루어진 누더기. 헐겁고 느슨하게 연결돼 언제든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펄럭인다. 그러므로 우리와 우리 자신 사이에도, 우리와 다른 사람들 사이만큼이나 많은 다양성이 존재한다.”
진정한 나는 하나가 아니다. 내 안에는 여러 자아가 있다. 그중 어느 게 진짜고 어느 게 가짜 라고 할 수 없다. 나라는 사람은 다양한 자아가 모여 이뤄진 집합체다. 단일한 자기 개념에만 집착할 때 마음의 고통이 생기는 것이다. 다양한 자아 중 일부만 인정하고, 못마땅하게 느껴지는 것을 부정하고 억압할 때 심리적인 문제가 생긴다.
복잡함은 인간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조건이다. 복잡성이 줄어든다는 것은 마음이 메말라가고 있다는 뜻이다. 한 가지 자기상(self-image)에 자신을 과도하게 동일시하는 건, 배만 뽈록 나오고 팔다리는 근육 하나 없이 가늘어진 몸으로 살아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승진과 돈, 인정과 평판…. 삶의 다양한 가치 중 한 가지에만 올인하면 자아는 쪼그라들고 만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평소 듣지 않던 장르의 음악에 관심을 기울일 때 내 정체성도 다양하게 분화한다. 마음 건강을 위해선 한결같고 단순해지기보다는 복잡한 속성을 내면에 골고루 품고 있는 게 더 낫다.
정신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