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 정읍의 가을은 색채의 마술사와 함께 온다. 하얀 노란 색으로 가득한 구절초에 이어 울긋불긋 단풍이 한바탕 색의 향연을 펼친다.
먼저 은백색의 ‘동화나라’ 구절초테마공원. 산내면 매죽리 옥정호 지류인 추령천이 휘감아 도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정읍에서 아흔아홉 굽이를 휘돈다는 구절재를 넘으면 닿는다. ‘가을이 물드는 계곡’ 추령천은 황금들녘 사이로 320도 굽이 돌아가는 물줄기로 넉넉한 가을 풍경을 그려낸다.
구절초는 국화과 여러해살이풀로 키가 50∼70㎝. 9∼10월에 은은한 담홍색이나 흰색으로 꽃이 피는 대표적인 가을 야생화로, 흔히 들국화로 불린다. 5월 단오에 줄기가 다섯 마디가 되고, 음력 9월 9일에는 아홉 마디가 된다고 해 이름 지어졌다. 꽃말은 어머니의 사랑, 밝음, 순수 등이다. 딸을 출가시킨 친정어머니들이 예전부터 9월이 되면 갓 피어난 구절초를 정성껏 채집해 그늘에 말려 뒀다가 시집간 딸이 해산하고 친정에 오면 달여 먹이곤 했다. 신선이 어머니들에게 준 약초라는 뜻의 선모초(仙母草)라 불리는 까닭이다.
맑은 공기가 감도는 22만여㎡의 소나무 숲 가득 피어난 구절초가 은은한 향과 수수하면서도 단아한 자태로 장관을 이룬다. 가녀린 몸을 바람에 맡긴 채 하늘거리는 모습은 소박하면서도 청초하다. 야트막한 산자락 능선을 따라 흩뿌려진 듯 피어 있는 꽃을 보면 비밀의 정원에 들어선 듯한 느낌이다.
드문드문 검은 빛을 띤 소나무는 구절초의 아름다움을 돋우는 배경이다. 특히 가을 아침 옥정호반에 안개가 자욱하게 드리우면 솔숲과 어우러진 구절초는 몽환적인 풍경을 펼쳐낸다. 고요하고 은은한 멋이 풍긴다. 한낮에도 숲은 활기차다. 꽃밭 사이로 속삭이며 거니는 연인들이 꽃향기처럼 그윽한 사랑을 뿜어낸다.
구절초 산책길은 물길을 따라 이어지고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도 지난다. 걷다가 힘들면 숲 가운데 마련된 벤치에서 다리쉼을 하거나 꽃과 더불어 즐기면 된다.
‘유색벼 아트 전망대’에 오르면 또 하나의 볼거리가 기다린다. 전망대 아래 넓은 들에 색이 다른 품종의 벼로 그림과 글자를 수놓은 것. 올해는 구절초테마공원을 배경으로 촬영한 영화 ‘궁합’의 이승기와 심은경의 해후 장면이 ‘그대가 있어 행복합니다’라는 글귀와 함께 펼쳐져 있다. 구절초 여행을 함께 온 사람이 나의 소중한 인연임을 강조한 디자인이라고 한다. 지난 14일 축제는 끝났지만 아직 늦지는 않았다. 오히려 호젓하게 즐기려는 여행객들이 찾기에 좋다.
구절초공원 인근에 ‘비단 다리’라는 뜻을 가진 능교(綾橋)가 있다. 약 50년 된 다리는 영화 ‘남부군’과 드라마 ‘전우’ 등의 촬영지로 유명하다. 전우에서 배우 최수종이 마지막 사투를 벌인 ‘비단교 전투’의 무대로 사용됐다. 능교 바로 옆으로는 과거 국도로 사용되던 길이 옥정호를 따라 섬진강으로 이어진다. 자전거를 대여해 옛길을 따라 달려보는 것도 좋다. 새롭게 건설되는 구절초터널과 다리 공사가 한창이다.
구절초공원을 나와 산내면소재지에서 30번 국도를 타면 옥정호 순환도로로 들어선다. 5분여를 달리면 호수를 베고 잠든다는 수침동마을이다. 수침동마을을 지나면 장금리다. TV드라마 ‘대장금’의 실제 주인공의 출생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구절초의 하얀 시간이 지나면 단풍의 붉은 시간이 찾아든다. 내장산. 전국 최고의 단풍명소로 꼽히는 곳이다. 전남 장성, 전북 순창과 경계를 함께하고 있지만 정읍에 가장 많이 따라붙는다.
내장산은 ‘안 내(內)’자에다 ‘감출 장(藏)’자를 쓴다. 그 이름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이 서래봉(622m)이다. 연이은 바위봉우리가 마치 농기구 써레와 비슷하게 생겼다고 해서 이름을 얻었다. 내장산 최고봉은 해발 763m의 신선봉이지만 가장 돋보이는 봉우리는 서래봉이다. 서래봉은 거대한 바윗덩어리가 늘어서서 장관을 이룬다. 봉우리에 올라 서면 장군봉696m)·연자봉(675m)·신선봉·까치봉(717m)·연지봉(670m)·망해봉(679m)·불출봉(619m)·서래봉·월영봉(427m) 등 9개 봉우리가 동쪽으로 트인 말발굽 모양을 하며 거대한 장막을 이루고 있다. 봉우리마다 가을색으로 갈아입고 있다. 올해 내장산의 첫 단풍 예정 시기는 10월 21일, 절정 시기는 11월 9일쯤으로 전망됐다.
내장산 연봉이 만든 천혜의 장막 안에 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을 감췄던 곳이 있다. 용굴이다. 내장사에서 금선계곡을 따라 1.8㎞ 오르면 수직의 절벽 아래 푹 파인 굴을 만난다. 굴 안에는 누군가 쌓은 작은 돌탑이 여럿 있다.
전주사고에 보관돼 있던 조선왕조실록을 이곳으로 옮긴 선비는 손홍록과 안의다. 전주 함락이 목전에 이르자 조선왕조실록 805권을 쉰여섯 개 궤짝에 나눠 담고 말에 실어 60㎞쯤 떨어진 내장산까지 옮겨왔다. 서울, 충주, 성주에 나눠 보관하고 있던 왕조실록이 모두 다 불타고 찢겨 사라진 뒤에 마지막 남은 딱 하나의 것이었다.
정읍=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