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일선(68)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는 이력이 화려하다.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에서 푸드 서비스 매니지먼트 박사학위를 받은 뒤 모교인 연세대로 돌아와 식품영양학과 교수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한국영양협회장을 지내면서 영양사 지위 향상에 기여했고 학교급식과 영양 교육 확대에 이바지했다.
양 교수는 국내외 소외된 아이들의 삶과 질, 인권 향상을 위해 헌신했다. 1986년 설립된 국제영양구호 선교단체인 ‘위드(WITH·Wholistic Interest Through Health)’와 ‘오병이어선교회’에서 활동했다. 또 월드비전 한국 이사직에 이어 국제이사까지 맡는 등 정년을 훌쩍 넘기면서까지 종횡무진 활약 중이다. 양 교수를 최근 서울 여의도 월드비전 건물에서 만났다. 그는 “내가 뭔가 이뤘다면 그 일은 모두 하나님 은혜”라면서 “우리 인생은 하나님에게 쓰일 때 비로소 빛이 난다”고 말했다.
고난 중에 만난 그리스도의 신비
양 교수는 20대 후반부터 30대가 끝날 때까지 미국에서 청춘을 바쳤다. 학업과 생계를 병행하느라 고초가 많았다. 한국에선 의사인 아버지의 보살핌 아래 별 어려움 없이 자랐지만 미국에선 달랐다. 그땐 한국을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그랬는지 멸시 당하기 일쑤였다. 한겨울 새벽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으며 버스를 타고 일하러 가곤 했다.
영어로 소통하는 일도 어려웠다. 라자냐(Lasagna) 같은 처음 보는 식재료를 제대로 읽지 못해 곤란을 겪기도 했다. 일터에선 처음 보는 전자제품이 즐비했는데, 알루미늄 호일에 싼 감자를 넣고 전자레인지를 돌렸다가 불똥이 사방으로 튀겼다. 집기가 불에 탔다. 현장 책임자에게 ‘피해금액이 얼마냐, 다달이 갚게 해달라’고 읍소한 적도 있다. 힘든 나날이었다.
생계를 꾸리는 문제 말고도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다. 82년 허리 디스크에 걸렸다. 몸을 옴짝달싹 움직일 수 없었다.
“발을 욕조 안에서 밖으로 옮기지도 못했어요. 평범한 사람들에겐 아무 일도 아니지만 아픈 사람들에겐 생과 사를 가를 수 있는 엄청난 일이란 걸 깨닫게 됐죠.”
허리 디스크로 고통을 받으며 장애인에 대해 편견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병상에 누워 당시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의 설교 테이프를 들었다. 신앙심이 두터워졌다.
“테이프 들으면서 많이 울었어요. 알을 깨고 나오는 경험을 수차례 했죠. 녹음테이프를 운동화 상자에 넣어놓고 형제자매나 이웃들에게 부쳐주곤 했죠.”
고난이 그를 더 단단하게 만들었다. 어려운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미국에서 돌아온 뒤 열정적인 봉사활동을 하는데 밑거름이 됐다.
“매일 하나님께 불평했어요. 발버둥 치는데도 왜 이리 인정받기 어려운지 털어놓았죠. 나중에 알았어요. ‘한국에서 경험하지 못할 고난을 일부러 겪게 하셨구나. 어려운 사람들을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하려고 예비하셨구나’하고 깨달았죠.”
그때 쌓은 이해심과 배려심은 양 교수를 크리스천 리더로 성장시켜줬다. 130년 역사의 연세대에서 최초의 여성 학장이 됐다. 교무처장과 여성학부장 등에도 올랐다. 2002년엔 연세대 여성동창회에서 가장 뛰어난 여자졸업생으로 선정됐고 2002년과 2014년에는 최우수 교수상을 받았다.
초콜릿 케이크 레시피 같은 삶
양 교수는 미국에서 잠시 다녔던 교회 목사의 설교를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어느 날 단상에 오른 목사가 밀가루 봉지와 소금, 설탕, 코코아 파우더 등을 늘어놓더니 하나씩 찍어 먹어보라고 했다. 설탕은 달았지만 소금은 짰다. 베이킹소다나 코코아 파우더에선 쓴맛이 났고 밀가루는 텁텁했다. 목사는 달고 짜고 쓴맛이 합쳐져야만 맛있는 초콜릿 케이크를 구울 수 있다고 했다. 우리 인생도 적당량의 고난과 역경이 있어야만 하나님 보시기에 부족함 없는 사람으로 다시 빚어질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줬다.
그때 로마서 8장 28절 ‘모든 일들이 서로 협력해서 결국에는 선을 이룰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는 말씀이 떠올랐다. 고난이 사람을 단단하고 온전하게 만드는 것처럼 가난과 풍요의 격차는 세상을 좀 더 조화롭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과거의 인간이 겪은 위기가 가난 탓이었다면 현재의 인간이 겪는 위기는 풍요에서 온다고 믿는다. 무엇이든 부족할 것 없는 현대인은 과거의 어려움과 가난을 망각하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데 급급해하면서 예전보다 더 영혼이 메말라가고 있다는 설명이다.
“모든 게 넘치면 모자람을 알 수 없어요. 풍요로운 사람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이해하기 어렵죠. 실제로 지구촌 어딘가에는 굶어 죽는 사람들이 넘쳐나는데 잘 사는 나라 사람들은 비만으로 고통받잖아요. 풍요롭지만 나누지 못하는 현대인의 삶이야말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에요.”
양 교수는 공유의 정신이야말로 인간이 지녀야 할 절대 가치라고 믿는다.
“아프리카에 가보세요. 우리가 아는 논과 밭이 아닙니다. 씨앗을 심고 물을 뿌려도 열매를 맺지 않는 땅이 태반이죠. 그곳을 보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곡괭이를 들고 일하라고 하시면서, 왜 이렇게 이 땅을 내버려 두신 걸까’하고 생각하게 돼요.”
그가 내린 결론은 나눔과 베풂이다. 풍족한 자들이 그렇지 않은 자들을 위해 베풀며 살아야 모두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모두 풍요롭다면 더할 나위 없겠죠. 애석하게도 세상은 풍요로운 곳과 빈곤만 가득한 곳이 뒤섞여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서로 나누며 함께 살아야 합니다.”
삶의 구체적인 목표는 간단하다. 모두 잘 먹고 건강하게 살자는 것이다. 여기에 식품영양학자로서 어려운 이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이 가진 일부를 내어줄 수 있는 이타적인 인재를 기르는데 헌신하겠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제가 굉장히 건강한 줄 알아요. 사실 아픈 곳이 많거든요. 그래도 많은 사람들 앞에 서면 신이 나요.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람이 되라는 말을 할 때마다 힘이 샘솟습니다. 먹지 못하거나 아픈 사람 있으면 도와주자고 그래요. 그 일이 힘들면 하나님 만나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능치 못할 일이 없으니까요.”
양 교수는 이사야 40장 31절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께 소망을 두는 사람은 언제나 새 힘을 얻을 것이니, 마치 독수리가 힘차게 날개를 치며 하늘로 솟구쳐 오르듯 그렇게 높이 올라갈 것이요, 아무리 멀리 뛰어도 지치지 않고, 아무리 오래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는 구절을 항상 새기며 산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 손에 붙들릴 때 의미가 있고 빛이 납니다. 하나님을 알아가려는 열망이 있다면 우리는 어디서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죠. 하나님이 채워주시니 남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나눠주세요. 여러분!”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