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첫머리를 장식하는 건 두 저자의 자화자찬이다. 이 책이야말로 중국의 지도자 덩샤오핑(1904∼1997)의 삶을 온전히 담아낸 유일무이한 평전이라는 주장이 간단없이 이어진다.
“우리 책은 20세기 후반 중국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지도자에 대한 유일하게 완전하고 객관적인 전기다” “전기 작가로서 모든 자료를 처음으로 이용한 것은 우리다” “중국어 러시아어 영어 프랑스어로 된 현존하는 거의 모든 2차 자료들도 활용하고 있다”….
실제로 이 책에는 그동안 세상에 제대로 알려진 적 없던 덩샤오핑의 행적이 빽빽하게 담겨 있다. 기함할 정도로 많은 사료를 엮어서 매끈하게 마름질한 솜씨도 보통이 아니다. 덩샤오핑이 남긴 빛과 그늘을 두루 살필 수 있는 역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두 저자는 무슨 이유에서 오래전 세상을 떠난 덩샤오핑의 삶을 정리한 것일까. 왜 우린 그의 삶을 반추해봐야 하는 걸까. 일단 책에 담긴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덩샤오핑의 민낯
덩샤오핑이 누구이고, 그가 남긴 공과가 무엇인지는 위키백과 검색창에 ‘덩샤오핑’이라는 검색어를 입력하는 것만으로도 일별할 수 있다. 이런 세상에 살면서 구태여 평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인터넷 정보란 건 기본적으로 주마간산 수준에 그칠 때가 많아서일 것이다.
‘설계자 덩샤오핑’에는 온라인의 세계에선 발견할 수 없는 진귀한 정보가 잇달아 등장한다.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돼 있는데, 각각 ‘볼셰비키’ ‘마오주의자’ ‘실용주의자’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이들 단어는 덩샤오핑의 세계를 꿰뚫는 3개의 키워드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일단 덩샤오핑이 공산주의를 처음 받아들인 순간이 언제인지 살펴보자. 때는 그의 나이 열아홉 살이던 1923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던 덩샤오핑은 경제적 형편 탓에 학업을 이어갈 수 없게 되자 자본주의에 환멸을 느낀다. 그는 당시 세계를 휩쓸던 볼셰비키 운동에 가담한다. 즉, 덩샤오핑은 여러 이데올로기를 비교하고 분석해 공산주의에 매료된 게 아니었다.
“(덩샤오핑이) 볼셰비키 운동에 참여한 이유는 그의 사상이 심오한 진화를 거쳤기 때문이 아니라 자본주의 세계가 그에게 가한 모욕과 상처를 보상받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많은 다른 공산주의자들과 달리 젊은 덩은 이데올로기 투쟁을 거쳐 공산주의에 도달하지 않았다. 그 후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대체로 나는 다른 사상의 영향에 노출된 적이 없다. 나는 곧장 공산주의에 도달했다.’”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은 중국에서 ‘건국의 아버지’로 통하는 마오쩌둥이다. 덩샤오핑은 어기찬 공산주의자였던 마오쩌둥과 달리 온건한 개혁주의자 정도로 여겨지곤 하는데, 두 저자는 이런 평가에 반기를 든다. 책에는 “덩과 마오는 한배에서 태어난 두 사람”이었다고 적혀 있다. 실제로 덩샤오핑은 권력의 정점에 올랐을 때 마오쩌둥과 흡사한 모습을 보여줬다. 고집불통에 독불장군이었다. 마오쩌둥이 건재할 때에는 그에게 충성을 다했다. 인간이 이 정도로 비굴해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행적은 일반인의 예상을 뛰어넘는다.
예컨대 문화대혁명 시절엔 이런 일이 있었다. 덩샤오핑은 당시 권력에서 밀려났다. 타락한 부르주아라는 꼬리표가 붙었다. 그 시절 조리돌림을 당한 수많은 지식인이나 정치인이 그렇듯 덩샤오핑은 사람들에게 호되게 욕을 먹었으며 두들겨 맞기까지 했다. 급기야 그의 아들은 감시를 피해 건물 4층에서 뛰어내렸다가 척추가 부러졌고 불구의 몸이 됐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마오쩌둥에게 앙심을 품거나 복수를 다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달랐다. 책에 담긴 표현을 그대로 옮기자면 “오랜 기간의 정치생활을 거치는 동안 위선적 민첩함은 그의 성격의 일부”로 자리 잡았다. 그는 마오쩌둥에게 편지를 띄운다.
“은퇴하기 전에 몇 년 더 일할 수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제가 진 빚을 조금이나마 갚을 기회가 있기를 갈망하고 있습니다. 진심으로 주석의 장수를 간절히 빕니다. 주석께서 무병장수하셔야 당 전체와 우리 인민들 모두가 행복해 마지않을 것입니다.”
이 책의 백미는 바로 이런 대목이다. 중국식 시장사회주의를 설계하고 개시하고 안내한 정치인 덩샤오핑이 아니라 ‘인간’ 덩샤오핑의 민낯을 확인하게 만든다. 좋게 말하자면 그는 노련한 정치가였고, 나쁘게 표현하자면 영악하고 때론 극도로 잔인한 지도자였다.
“(덩샤오핑에게) 목적이란 항상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그에게 단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만 중요했다. …그는 억척스럽고 강인한 남자, 뛰어난 정치인이자 조직자였다. 그러나 그의 사전에 휴머니즘 그리고 도덕성 같은 개념은 없었다.”
덩샤오핑을 읽어야 하는 이유
두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러시아 국립 사회·정치문서 보관소에 있던 구소련의 미공개 문서들을 발굴해 들여다봤다.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처럼 중국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들의 문서 3300여건을 검토했고 그 밖의 각종 자료들도 자세히 살폈다.
평전의 성패는 인물의 인생 역정 곳곳에 잠복해 있는 ‘디테일’을 얼마나 찾아냈는지에 달려 있을 때가 많은데, ‘설계자 덩샤오핑’은 그런 평전의 전범이 될 만한 작품이다.
두 저자는 특정 사건이 발생한 날짜나 시간은 물론이고 등장인물의 옷차림이나 식사 메뉴까지 자세하게 묘사한다. 그래서 이 책은 덩샤오핑이라는 인물을 중심에 놓고 중국의 현대사를 그려낸 대단한 스케일의 세밀화라고 할 수 있다. 책의 시작이나 끝을 장식하는 덩샤오핑의 연표나 가계도, 살뜰하게 정리된 약 200쪽 분량의 각주도 인상적이다.
알려졌다시피 덩샤오핑은 78년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고 닫혀 있던 중국의 문을 세계를 향해 열어젖혔다. 톈안먼 사태가 그의 인생에 커다란 얼룩을 남기긴 했지만 여전히 덩샤오핑의 업적을 떠받드는 사람도 적지 않다. 지금의 중국을 있게 만든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을 통해 우리는 중국을 이해하는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다. 덩샤오핑의 궤적을 따라가려는 지금의 북한을 이해하는 데에도 요긴할 것이다.
두 저자는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와 시장경제가 공존하는 중국의 시스템을 거론하면서 “(이런 체제는) 덩샤오핑이 만들어낸 살아 있는 공생체”라고 규정한 뒤 이런 말을 덧붙인다.
“중국인들이 자유 그리고 시민권이라는 개념들을 언젠가 포용할 때, 그 새로운 세대의 중국인들은 길고 굴곡진 그들의 역사 속에서 분명히 덩샤오핑에게 보다 적합한 자리를 찾아줄 것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