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점심식사차 만난 기업 임원이 회사생활을 이야기하다가 ‘요즘 젊은이들’의 정신적 나약함을 거론했다. “내가 젊었을 땐 직장상사가 쌍욕을 해도 ‘예, 알겠습니다!’ 했는데 지금 젊은 직원들은 조금만 싫으면 얼굴에 나타낸다”는 식의 불평이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대학생 딸이 ‘요즘 애들은 유리멘털(유리처럼 약한 정신력)이라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청년세대에 대한 냉소가 기성세대인 자신만의 견해가 아니라는 변호로 들렸다. 시간이 흘러 사회를 몸소 겪고 있을 그의 딸은 지금도 동시대 청년들의 정신력을 탓하고 있을까.
엄연히 세상은 무딘 감수성을 탄핵하는 쪽으로 가고 있다. 강자의 자리에서는 약자의 인격과 감정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불편한 언행에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나약함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심리다. 그럼에도 여전히 약자의 감정은 보이지 않는 규범과 유형(有形)의 강제력에 억눌려 있다. 우리 사회가 ‘갑질’ 문제와 함께 주목하기 시작한 ‘감정노동’은 몇몇 직종의 특수한 고충에 한정되지 않는다. 조직과 상급자로부터의 불이익을 우려해 자기 감정을 억누르고 거짓 감정을 꾸며내야 하는 모든 직장인이 감정노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의 일’ 아닌 모두의 감정노동
감정노동은 실제 기분과 상관없이 조직과 상급자가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정서적 반응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보통 짜증 분노 슬픔 불쾌 등 부정적인 감정을 억누르고 미소나 고분고분한 말투, 동의의 몸짓으로 긍정적 정서를 드러내게 된다. 조직생활에서 흔히 요구받는 ‘표정관리’, 나아가 ‘표정연기’ 자체가 감정노동이다. 억지 표정을 지으면서도 거짓인 티가 나지 않도록 해야 하는 감정노동에는 상당한 정서적·정신적 소모가 뒤따른다. 담당 직무 외에 추가로 감당해야 하는 노동이면서도 대가가 주어지지 않는 또 하나의 ‘그림자노동’인 것이다. 전문가들은 근로자가 자기 심리를 통제하며 조직의 표현규범대로 감정을 연출해야 하는 감정노동 행태를 ‘인간 감정의 상품화’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감정노동(Emotional Labor) 개념이 등장한 건 약 40년 전이다. 미국 사회학자 알리에 러셀 혹쉴드가 1979년 논문에 이어 83년 저서 ‘통제된 마음(The Managed Heart)’에서 감정노동을 기존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에 더해 새로운 유형의 노동으로 조명했다. 그는 감정노동을 ‘급여에 대한 대가로 이뤄지는 행위로서 외적으로 관찰 가능한 표정과 몸짓을 만들어내기 위해 근로자가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혹쉴드가 포문을 연 감정노동 연구는 90년대 미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됐다. 국내에서는 95년 이화여대 대학원 고미라씨의 여성학 석사학위 논문에서 ‘Emotional Labor’가 우리말 ‘감정노동’으로 옮겨졌다. 국내 연구가 본격화한 건 2010년 전후다. 갑질 논란이 한창이던 시기다.
감정노동 직업군으로는 콜센터 상담원과 항공 승무원, 은행 창구직원, 식당 종업원, 영업사원처럼 외부 고객을 주로 상대하는 직종을 먼저 꼽는다. 논의가 심화하면서 그 범위는 비서직, 행정직 등을 거쳐 거의 전 직종으로 확대됐다. 실제로 감정노동은 일반 사무직을 비롯한 모든 근로자가 겪는 문제다. 외부 고객뿐만 아니라 상사와 동료 등 내부 구성원을 상대로도 감정노동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정 직종을 대상으로 감정노동 연구를 시작한 혹쉴드는 93년 논문에서 상사, 동료, 부하직원 등을 감정노동의 ‘내부 고객’으로 규정했다. 미국 노던애리조나대 사회학과 캐런 퍼글리시 교수는 99년 논문 ‘감정노동의 결과’에서 “어떤 일에 종사한다면 (누구든) 감정노동을 경험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감정노동에 시들어가는 직장인들
일반 사무직 종사자의 감정노동 강도는 대인업무직 종사자와 차이가 없다. 캐나다 퀘벡주립대(UQAM) 경영학부 셀레스타 그리마드 교수 등이 이를 비교 검증한 논문 ‘감정노동과 소진’을 2002년 발표한 바 있다. 내부 고객은 업무시간 여부를 가리지 않고 사생활과 개인 감정 및 견해에 개입하는 빈도와 강도가 외부고객보다 높다. 무엇보다 인사권 등 직접적 제재 수단을 쥐고 있어 무시하거나 대항하기 어렵다. 외부 고객에 대한 서비스직의 정서적 응대는 업무로 여겨지지만 상급자 등에 대한 감정노동은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러니 응대 방침 같은 명시적 가이드라인이나 보호 장치가 없고 공론화되지도 않는다. 은행원 김모(35)씨는 “은행에 ‘막장 고객’이 나타나면 조직적으로 대응 방안을 논의하지만 ‘막장 상사’에 대해서는 그러지 않는다”며 “함께 일하는 직원들만 끙끙 앓을 뿐”이라고 전했다.
근로자가 원치 않는 감정노동을 하게 되는 근본 이유는 불이익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질책과 충돌, 갈등, 평판 악화 등은 부수적 문제다. 낮은 고과, 승진 누락 등 인사상 불이익 피하려면 조직과 상급자가 원하는 감정표현 방식을 따라야 한다. 여기에는 보이지 않는 압력이 있다. 5년차 회사원 박모(32)씨는 “입사 후 선배들에게 ‘표정관리 하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며 “최근 한 임원은 윗사람이 말하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가르쳐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는 거라며 지침을 내리기도 했다”고 말했다.
국내외 여러 연구에서 지나친 감정노동은 스트레스를 키워 정서적 소진을 촉진시키고 직무 열의와 몰입도, 만족도를 저하시키는 것으로 나타났다. 직무는 물론 조직, 동료들과 거리를 두는 등 냉소주의가 나타나고 직무 회피와 이직 의도도 커진다. 당연히 직무 성과는 떨어진다. 경기대 관광전문대학원 이순정씨는 석사학위 논문 ‘감정노동이 소진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 상사와의 감정노동을 중심으로’에서 상사를 대상으로 한 표면 연기는 근로자를 정서적으로 고갈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이씨는 “조직 내 감정노동 대상자의 스트레스 유발 정도가 가장 높은 요인은 직장상사”라며 “이러한 스트레스가 점점 깊어져 ‘소진 증후군’에 시달리는 현대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고 진단했다.
상사의 감정노동과 리더십
고려대 언론대학원 전미옥씨는 석사학위 논문 ‘조직문화와 커뮤니케이션이 감정노동에 미치는 영향 연구’에서 팀워크와 단결·적응을 강조하는 집단적 문화가 가장 많은 감정노동을 유발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다. 이어 위계적 문화, 외부 환경 변화에 대한 적응과 혁신을 강조하는 문화 순으로 많은 감정노동을 일으켰다. 내부 구성원 간 신뢰와 정보 공유를 강조하는 커뮤니케이션 분위기도 조직 내 감정노동을 키우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상사와 부하직원 간 감정노동은 상사의 리더십에 좌우된다고 연구 결과들은 말한다. 권위적인 상사와 일하는 직원은 더 많은 감정노동을 하며 직업상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적·정서적·신체적 탈진 현상인 ‘직무소진’을 경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남대 행정학과 최성욱 교수는 2014년 한국조직학회보에 발표한 논문에서 “상관의 행태가 감정 유해성을 발생시킨다”며 이렇게 지적했다. “부하의 감정적 어려움과 과도한 스트레스를 일종의 통제 도구로 활용하는 고의적 행태, 무소신과 우유부단으로 특징되는 비일관적 결정 행태, 적절치 못한 대인관계와 지나친 간섭 등과 같은 무능한 행태, 부하의 아이디어를 가로채거나 승진 약속과 기대를 저버리고 사적 비밀을 누설하는 것과 같은 배신 행태, 부하의 감정뿐만 아니라 상사 본인의 감정도 이해하지 못하는 둔감한 행태가 조직에 독을 살포한다.”
상급자가 부하직원을 상대로 감정노동을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다만 그 이유와 강도, 자율성, 영향 등은 하급자의 감정노동과 큰 차이를 보인다. 직원들이 싫은 소리나 불이익을 피하려고 상사 앞에서 감정을 꾸미는 것과 달리 상사들은 직원들과 매끄러운 관계를 유지하며 업무를 부드럽게 처리하기 위해 자신의 감정 표현을 조절한다. 관련 연구들은 관리자의 감정노동이 사기 진작과 실적 향상 등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때문에 상급자의 감정노동은 긍정적인 리더십으로 평가된다. 경희대 국제대학원 국제경영학과 공준서씨는 박사학위 논문에서 “리더들의 감정노동 활동은 부하의 심리적 자본에 영향을 미친다”며 “이런 결과는 부하의 직무 몰입이 높아짐을 의미한다”고 기술했다.
“부장님, 카톡 좀 그만 보내실래요?”
감정노동은 실제 감정과 표현해야 할 감정 간의 부조화가 클수록, 빈도가 잦고 오래 지속될수록, 또 표현해야 할 감정이 다양할수록 강도가 높아진다. 최근에는 카카오톡과 라인, 페이스북 메신저 등 모바일 메신저를 업무에 사용하게 되면서 감정노동의 빈도와 지속시간이 점점 늘고 있다. 충북대 대학원 경영정보학과 정지은씨는 석사학위 논문에서 일과 후 스마트폰을 이용한 상사의 연락이 근로자의 감정노동을 증가시킨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연구에서 근로자들은 일과시간 여하를 가리지 않고 단체 대화방에서 일어나는 대화를 실시간으로 확인하고 즉시 응답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화방에서 직원들은 상급자가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도 대답 내용과 방식을 고민하게 된다. 퇴근 후나 휴일에도 싫은 티를 감추고 적절히 호응해야 한다. 한밤중은 물론 새벽 2∼3시에도 업무 메시지를 받는다는 회사원 김모(33)씨는 “휴일에도 업무 연락은 물론 상사의 잡담에까지 응대를 해줘야 한다”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일 때가 많다”고 말했다. 이모(31·여)씨는 “육아휴직 중에도 부서장이 단체 카톡방에서 못 나가게 했다”며 “잠깐 사이에도 미확인 메시지가 수십개씩 떠 있는 걸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났다”고 했다. 정지은씨는 “일과 후 상사의 연락은 의도와 상관없이 근로자의 근무시간을 24시간, 주7일 체제로 만드는 데 영향을 미친다”며 “휴대전화가 생기기 전의 에티켓처럼 일과 후 저녁시간에는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연락을 자제하는 문화나 정책의 형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순정씨는 논문에서 “현대사회는 ‘감정노동의 시대’라고 표현될 정도”라며 “정신적 노동, 감정적 노동의 괴로움은 손쉽게 ‘힐링’되지 않으며, 억압된 감정표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자기 자신조차 스스로의 감정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도 알지 못하는 혼잡에 빠지게 된다”고 경고했다. 전미옥씨는 “조직에 속한 구성원들의 감정적 건강을 지키는 것이 조직의 성과를 지키는 것”이라며 “(감정노동 감소 방법을 강구하는 건) 소비가 아니라 조직의 지속 가능한 성장과 높은 성과를 얻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인식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