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세자가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살해에 개입한 정황 증거가 계속 나오고 있다. 카슈끄지 피살을 정보기관원 개인의 일탈로 치부하려던 사우디 정부는 갈수록 궁지에 몰리는 형국이다.
미국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들은 17일(현지시간) 카슈끄지 살해 당시 상황을 담은 녹음 파일을 청취한 터키 고위관리의 증언을 공개했다. 이 관리에 따르면 카슈끄지는 결혼 관련 서류 발급을 위해 지난 2일 오후 1시15분쯤 이스탄불 소재 사우디 총영사관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몇 시간 전부터 사우디 요원 15명이 카슈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원 중 일부는 빈 살만 왕세자의 개인 경호원이었다.
요원들은 카슈끄지가 무함마드 알 오타이비 총영사의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붙잡아 마구 때리고 손가락을 절단하는 등의 고문을 가했다. 알 오타이비 총영사가 “밖에 나가서 하라. 내가 곤란해질 수 있다”고 항의했지만, 한 요원은 “살아서 사우디로 돌아가고 싶으면 가만히 있어라”고 위협했다.
카슈끄지는 요원들에게 붙잡힌 지 단 몇 분 만에 숨졌다. 요원들은 곧바로 법의학자 살라 무함마드 알 투바이지 지휘하에 시신 훼손에 들어갔다. 알 투바이지는 당시 헤드폰을 쓰고 음악을 듣고 있었고 다른 요원들에게 음악을 들으라고 권하기도 했다고 터키 관리는 전했다. 긴장을 푸는 데 좋다는 이유에서였다. 폭행과 고문, 살해에 이르는 과정이 신속히 이뤄진 점을 미뤄 카슈끄지 사망이 우발적이었다는 사우디 정부 해명은 거짓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살해에 가담했던 요원 중 한 명이 리야드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로 숨졌다는 터키 언론 보도가 나오면서 증거 인멸 시도 의혹도 불거졌다.
미국은 여전히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녹음 파일을) 터키 정부에 요구했다”면서도 “만약 그것이 존재한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다.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사우디 방문 때 이번 사건의 배후로 의심받는 빈 살만 왕세자와 웃으며 악수했다가 구설에 올랐다.
미국 정보기관 관리들은 카슈끄지 피살에 빈 살만 왕세자가 개입했을 것으로 강하게 의심하고 있지만, 관련 팩트만 담은 보고서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올릴 방침인 것으로 전해졌다.
워싱턴포스트(WP)는 카슈끄지가 생전에 보낸 마지막 기고문을 공개했다. 카슈끄지는 “아랍 세계는 외부세력이 아니라 내부 권력자들이 만들어낸 ‘철의 장막’에 둘러싸여 있다”면서 “증오를 퍼뜨리는 국가주의 정부로부터 독립된 국제 언론을 창설해 아랍 세계의 구조적 문제를 널리 알릴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성은 기자 jse13080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