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배우’가 아닌 ‘영화감독’이다. 첫 장편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내놓은 추상미(45)를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났다. 첫 질문은 정해져 있었다. “어떻게 연출을 하게 되셨나요?” 그는 여유로운 미소로 답변을 시작했다.
“2009년 드라마 ‘시티홀’(SBS)을 끝으로 연기를 쉬었어요. 어릴 적 아버지(고 추송웅)의 무대를 동경해 연기를 시작했는데, 연극과 영화를 거쳐 드라마로 옮겨오면서 ‘내가 소모적인 상품이 되어가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만해야겠다 생각하던 차에 오랜 꿈이었던 연출이 떠올랐어요.”
개인적인 부침의 시기도 있었다. 2007년 뮤지컬 배우 이석준(46)과 결혼한 그는 한차례 유산의 아픔을 겪은 뒤 중앙대 대학원에 들어가 영상제작 공부를 시작했다. 다시 임신에 성공해 2011년 아들을 얻었으나 극심한 산후우울증이 찾아왔다. 그 시기에 만든 단편영화 ‘분장실’(2010) ‘영향 아래의 여자’(2013)는 모두 상처에 관한 이야기였다.
우울증을 극복하리라는 마음으로 장편 연출 준비를 시작했다. 때마침 북한 꽃제비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게 됐는데, 알 수 없는 감정이 북받쳐 올라 눈물이 쏟아졌다. “통일에 별 관심도 없던 제가, 분단의 비극을 처음으로 인식한 순간이었어요. 지척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다니, 어처구니없게 느껴졌죠.”
소재를 정하고 자료조사를 하던 중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다. 1951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의 전쟁고아 1500여명이 비밀리에 폴란드로 보내졌다는 것. 전쟁고아들은 폴란드 서부 도시 브로츠와프 근교의 작은 마을 프와코비체의 한 양육원에서 생활했는데, 북한으로 다시 송환되기까지 8년 동안 폴란드 교사 300여명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았다.
추상미는 “주변 관계자들에게 이 소재를 이야기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갖겠느냐’는 식의 부정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하지만 이 의미 있는 실화를 나 혼자만 알고 있을 순 없었다”면서 “폴란드 교사 300명 중 현재 15명만이 살아계신다. 그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그들의 육성을 기록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고 말했다.
처음 기획한 건 북한 전쟁고아 이야기를 다룬 극영화로, 1년 반 동안 시나리오 작업에 매진했다. 한데 현지 로케이션 촬영 사전답사 계획을 짜던 중 계획이 바뀌었다. 폴란드 답사 전 과정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카메라에 담아내기로 했다. 아흔이 다 된 지금까지도 아이들을 그리워하는 생존 교사들의 모습을 영상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폴란드로 간 아이들’이다.
먼저 기획했던 극영화에 캐스팅된 탈북 소녀 이송과 그 여정을 함께했다. 2010년 탈북해 2014년 한국에 온 이송은 초반 추상미에게조차 마음을 열지 않을 정도로 경계심에 차 있었다. 하지만 폴란드 교사들을 만나 소통하면서 차츰 자신의 뿌리에 대한 자긍심을 느끼게 됐다. 추상미는 “역사의 상처와 개인의 상처가 만나는 지점에 포커스를 맞췄는데, 송이의 스토리는 그 과정에서 우연히 얻은 선물이었다”고 했다.
추상미는 그들의 이야기를 “상처의 연대”라고 설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폴란드인들이 또 다른 전쟁에 내몰린 동양 아이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었다는 것이다. “양육원 원장님이 아이들 모습이 자신의 유년시절 같았다고 하시더라고요. 아이들과 함께한 그때가 당신 인생 중 가장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추상미는 당분간 연기자로 복귀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언젠가 무대에는 한번쯤 서보고 싶지만,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 대한 미련은 없다는 게 그의 말이다. 다만 자신이 연출하는 작품에 필요한 역할이 있다면 출연하겠노라고 여지를 열어뒀다. 이를테면 도도한 여배우들이 꺼려 할 ‘리얼한’ 아줌마 캐릭터 같은.
“지금은 감독으로서의 삶이 재미있어요. 내 목소리를 더 적극적으로 담아낼 수 있는 판이 열린 거죠. 특히 이번 작품을 통해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실마리를 얻었어요. 우리 사회의 분열과 상처들을 모성으로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모성을 주제로 한 작품을 계속 만들고 싶어요.”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