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英·獨 정상과 잇단 정상회담, 모두 “北 비핵화 실천부터” 강조
靑 “제재 완화 공론화 성과 거둬”…北·美 협상 언제 틀어질지 몰라
文, 안보리·유럽·교황 끌어들여 비핵화 협상 불가역성 보강 추진
문재인 대통령은 유럽 순방 기간 내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완화 필요성을 역설했다. 하지만 유럽의 정상들이 제재 완화보다는 북한의 비핵화 실천을 강조하면서 높은 벽을 절감해야 했다. 북·미 비핵화 협상 성과가 가시화되지 않은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유럽 설득에 나선 배경에도 관심이 모아진다.
문 대통령은 순방 기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인 영국, 프랑스와 잇달아 정상회담을 개최했다. 또 유럽연합(EU)의 핵심국인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하고도 정상회담을 열고 대북 제재 완화 필요성을 설득했다. 하지만 세 정상은 모두 문재인정부의 평화구축 노력엔 지지를 보내면서도 제재 완화보다는 북한의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 목표를 재확인하고, 현 단계에서 북한이 더욱 확실한 비핵화 조치를 먼저 취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문 대통령이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아셈) 발언에서도 “한반도의 평화는 아시아와 유럽의 공동번영으로 이어질 것이다. 성원을 부탁한다”고 요청했지만 아셈 의장성명에는 북한에 대한 ‘CVID’가 더 부각됐다. 의장성명은 남·북·미 3자 간 교차 정상회담과 4·27 판문점 선언 등의 합의 이행을 지지하면서도 북한의 모든 핵무기·대량살상무기(WMD)·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등의 프로그램 및 시설 폐기를 촉구했다.
청와대는 유럽을 상대로 대북 제재 완화를 공론화했다는 데 의미를 두고 있지만 문 대통령 입장에서는 체면을 구긴 셈이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21일 “한반도 비핵화의 직접 협상 당사자인 남·북·미에 비해 유럽은 그동안 비핵화 협상 진행 과정을 알지 못했던 상황”이라며 “이번 순방을 통해 상황인식의 괴리감을 줄이고, 북한의 비핵화 추가 조치 시 대북 제재를 완화할 수 있다는 큰 틀의 공감대를 얻은 건 성과”라고 설명했다. 이어 “EU가 한반도 현재 정세와 비핵화 협상 상황을 정확하게 알게 됐다는 측면에서 진전이 있었다”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이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완화에 뛰어든 것을 두고는 해석이 엇갈린다. 우선 북·미 대화가 상당부분 물밑에서 진행됐기 때문에 다음 단계로 나선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평양을 방문해 직접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으로부터 상세한 설명을 들었다. 이어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다시 정상회담을 갖고 협상 상황을 논의했다. 정상들 간 ‘톱다운’ 외교를 통해 모종의 합의에 이른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와 반대로 북·미 협상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상황에서 문재인정부 주도의 견인 작업에 나선 게 아니냐는 해석도 있다. 정부는 미국과의 마찰에도 불구하고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개소하고, 개성공단·금강산관광 재개를 타진하고 있다. 외교소식통은 “북·미 협상이 벌써 한 차례 중단된 데서 보듯 언제든 협상이 파행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정부 내에 적지 않다”며 “여기에 유럽을 끌어들여 보완장치를 마련하자는 구상”이라고 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북을 추진한 것 역시 같은 이유다. 북·미 협상 틀 외에 유엔 안보리와 유럽, 교황이라는 독립된 주체들을 합류시켜 한반도 비핵화 협상의 불가역성을 보강하겠다는 전략인 셈이다.
7박9일간의 유럽 순방을 마친 문 대통령은 이날 오후 경기도 성남 서울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브뤼셀·코펜하겐=강준구 기자 eye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