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유신, 반전에 반전… 1868년 10월 가까스로 길을 찾다

도쿠가와 막부는 나가사키만을 부분 개항하는 쇄국정책을 폈다. 작은 문 하나만 열어두고 큰 문은 닫아 걸은 셈인데 메이지유신은 전면 개국, 개항을 표명했다. 사진은 현 야마구치 현청 앞에 놓인 옛 조슈 번청 출입문.



 
요시다 쇼인이 만든 사설학교 쇼카손주쿠. 요시다는 이곳에서 조슈(현 야마구치)의 젊은 무사들에게 변화의 새 바람을 불어넣었다.
 
죠슈는 1864년 미·영·프·네덜란드 4개국 연합함대의 공격을 받아 해안포대가 괴멸됐다. 시모노세키 해안 미모수소카와 공원의 해안포대 모형.
 
사쓰마(현 가고시마)는 1863년 영국함대와 싸웠으나 쓰루마루성까지도 일부 파괴되는 피해를 겪었다. 현재는 역사자료센터로 바뀐 쓰루마루성 터.


글 싣는 순서

(상) 메이지유신은 왕정복고
(중) 근대 동아시아 악연의 시작
(하) 메이지유신의 좌절과 戰後


1868년 메이지유신(이하 유신)은 일본 근대 변혁운동의 결실이다. 우리에게 유신은 부러움의 대상인 동시에 침략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증오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만큼 유신은 한국과 깊은 관련성을 갖는다. 한반도는 유신으로 일어선 일본의 식민지(1910∼45)로 전락한 바 있으며 1945년 8월 일본의 패전으로 가까스로 해방을 얻었지만 동시에 분단으로 내몰려야 했다. 분단의 연원은 유신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에게 유신은 뭔가, 아니 무엇이라야 하는지 짚어보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일보는 유신 150주년 기념일인 23일에 맞춰 ‘동아시아의 시선으로 읽는 유신 150년’이란 기획시리즈를 마련했다. 이를 위해 지난 12∼18일 일본 혼슈의 야마구치현과 규슈 일원을 취재했다.

발단은 1853년 6월 미 해군 동인도함대 소속 군함 4척이 도쿄 앞바다, 정확하게는 가나가와현 우라가(浦賀) 연안에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흑선’이라고 불리는 페리함대의 등장이다. 이내 도쿠가와 막부는 미국의 압력을 거부하지 못하고 이듬해 3월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고, 이어 58년 6월 미·일 수호통상조약에 조인한다.

존왕과 양이(攘夷)는 당시 시대정신

문제는 막부가 교토 조정(천황)의 허락을 얻지 않고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었다는 점이다. 19세기 들어 서구 열강들의 내항이 잦아지면서 조정은 해안방비를 위한 해방칙서(海防勅書)를 막부에 보내, 외국과의 조약체결은 조정의 허락을 받도록 했다. 이는 막부가 무기력해졌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만큼 당시 열강들의 출몰이 위협적이었다. 막부의 일방적인 개국은 조정을 둘러싸고 찬반양론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이른바 개국과 양이(攘夷)의 대립이다.

그러나 막말사(막부 말기 역사) 연구자인 마치다 히로아키 교수는 “1861∼64년 일본인들은 존왕파이자 양이파였다”고 지적한다(‘양이의 막말사’, 2010). 여기서 말하는 존왕이란 기존의 조정과 막번체제(도쿠가와 막부가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구축하고 전국 300개 번을 다스리는 것)가 순응적으로 작동되는 틀을 말한다. 당시 존왕과 양이는 일종의 시대정신과도 같았다.

양이에서 개국으로, 그러나 근본은 양이

막부는 58년 개국을 반대하는 양이파에 강하게 대처했으나 정책 추진자인 이이 나오스케가 양이파에 암살되는 등 개국론은 힘을 잃고 만다. 이에 막부는 조정의 권위를 이용하기로 하고 조정과 막부의 혼인정책을 편다. 62년 2월 쇼군 이에모치(家茂)는 고메이 천황의 여동생 가즈노미야를 정실로 받아들인다. 이른바 공무합체(公武合體)의 탄생이다.

60년대 전반만 해도 개국파, 공무합체, 막부파까지도 심정적으론 양이에 가까웠다. 예컨대 막부의 공무합체에 협력적이었던 사쓰마(薩摩)조차 그해 62년 8월 영국 외교관을 길가에서 살상하는 등의 양이적인 행보를 드러낸다. 그 때문에 이듬해 사쓰마는 영국 함대의 포격을 받는 이른바 사쓰에(薩英)전쟁에 휘말리게 된다. 해안포대가 괴멸되고 쓰루마루성(鶴丸城)이 파괴될 정도의 피해를 입고서야 비로소 사쓰마는 양이를 버린다.

가장 극단적으로 양이론을 폈던 조슈(長州, 현 야마구치)도 예외가 아니다. 조슈는 63년 5월 일본의 관문인 시모노세키 해협에서 미국 민간선박에 포격을 가한다. 결국 이듬해 조슈는 미·영·프·네덜란드 4개국 함대의 집중 공격을 받는다(시모노세키전쟁). 조슈도 열강의 강한 군사력에 떼밀려 슬그머니 개국파로 전환한다.

심정적 양이파나 급격한 양이파도 개국의 흐름을 타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조정은 여전히 양이론을 유지했다. 사쓰에이전쟁, 시모노세키전쟁을 지켜본 고메이 천황은 교토 인근의 효고항(현 고베) 개항을 요구하는 막부에 대해 끝까지 반대했다. 조정은 67년 1월 고메이 천황 사후에야 개국으로 돌아섰다.

근왕양이에서 근왕개국으로

초기 양이론은 외국인 혐오증에서 비롯됐지만 이후 막부의 무역독점에 대한 반감이 더 크게 작용했다. 이는 무기력해진 막부에 대한 불만을 표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양이가 활용됐음을 뜻한다. 개국에 대한 흐름이 거세지면서 양이론은 막부를 쓰러뜨리기 위한 구실로서도 작용했다(시바 료타로, ‘메이지라는 나라’, 1989).

시대정신으로서 존왕·양이는 존왕과 근왕(勤王)으로 분화하면서 새로운 변화가 나타난다. 존왕이 기존 지배체제에 대한 존속을 전제로 한 것이라면 근왕은 기본 막부체제를 배제하고 오로지 임금에 충성을 하겠다는 새로운 왕정체제를 전제로 한다. 막부 존속과 타도가 대립적으로 드러나면서 흐름은 한 단계 더 진화하는데 근왕양이에서 근왕개국으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근왕개국으로의 길은 66년 1월 유력 번인 사쓰마와 조슈가 군사동맹으로 연대하고(삿초동맹·薩長同盟) 그리고 도사(土佐, 현 고치)가 여기에 참여하면서 본격화한다.

대정봉환으로 메이지시대 열려

삿초동맹은 막부가 조슈를 일방적으로 공격하는(1·2차 조슈정벌전쟁) 사태를 막고 막부체제를 종식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선 막부는 마침내 67년 11월 조정으로부터 위임받은 모든 통치권을 다시 조정에 반납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을 선언한다. 이어지는 순서는 고메이 천황을 잇는 당시 15세의 무쓰히토(睦仁)를 앞세워 새로운 왕정체제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막부군과 막부 지지자 대 조정을 지지하는 사쓰마·조슈 등 유력 번들의 충돌이 있었지만(68년 보신전쟁), 무쓰히토는 68년 10월 메이지(明治) 연호를 개창한다. 이게 바로 메이지유신이다.

돌이켜보면 메이지유신은 개국 양이 존왕 근왕 도막(倒幕·타도막부) 좌막(佐幕·막부옹호) 등이 뒤죽박죽 얽히면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가까스로 왕정복고에 이르렀다.

야마구치·규슈=글·사진 조용래 대기자 jubi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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