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국강병 외길로 달려온 日…전쟁에서 전쟁으로

규슈·야마구치 곳곳에 붙어 있는 메이지유신 150주년을 기념하는 일본 정부의 공식 포스터. 슬로건은 '메이지의 발자취를 이어가며 전하다'이다. 어떤 발자취를 전할 것인지는 드러나 있지 않다. 변혁을 이뤘다는 긍정적 측면과 전쟁으로 치달았던 부정적 역사가 함께 담겼으면 좋았을 텐데.


글 싣는 순서

(상) 메이지유신은 왕정복고
(중) 근대 동아시아 악연의 시작
(하) 메이지유신의 좌절과 戰後


변혁은 흔히 유혈을 부른다. 메이지유신도 외세에 대응하는 방법상의 대립으로 숱한 유혈 과정을 겪었다. 개국 대 양이, 막부 대 반막부가 적대하며 피를 흘렸다. 그 끝은 교토 조정의 관군(서군)이 막부군(동군)을 무너뜨린 보신(戊辰)전쟁이다. 그 과정에서 아이즈(會津) 등 막부를 지지한 동북지방 번들은 관군에 철저하게 짓밟혔다.

보신전쟁·내전 거치며 부국강병의 길

고 사사키 스구루 교토대 명예교수는 ‘보신전쟁-패자들의 메이지유신’(1979)에서 “사쓰마·조슈 등 유신 주도세력은 번들과의 연합정권을 만들기보다 보신전쟁을 통해 대립세력을 제거해 자신들이 원하는 정권을 실현하려 했다”며 불필요한 유혈 대응을 비판했다. 당연히 유신에 대한 동북지방 사람들의 불만은 앙금으로 남았다.

전쟁은 다시 전쟁을 불렀다. 이번엔 유신을 함께 이뤄낸 세력들 사이에서 대립과 반목이 불거지고 노선 다툼이 심화되면서 새 정부의 안착이라는 명목으로 다른 주장을 펴는 세력을 제거하려는 다툼, 즉 내전으로 이어졌다. 내전은 1877년 서남전쟁을 끝으로 막을 내렸으나 이후 메이지정부는 오로지 부국강병의 한 길로 내달렸다.

협조적 제국주의의 종속적 동반자 日

부국강병의 끝은 대외 전쟁이다. 메이지정부와 그 뒤를 잇는 일본 정부는 1894∼95년 청일전쟁, 1904∼05년 러일전쟁, 1914∼18년 1차대전,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45년 태평양전쟁 등을 겪었다. 일본은 1차대전에 참전하지 않았으나 전쟁 특수를 톡톡히 누렸다.

영국의 일본사학자 W G 비즐리는 ‘일본제국주의 1894∼1945, 거류지 제도와 동아시아’(1987)에서 동아시아에 진출한 서구 열강들의 협조적 공동대응 행태에 주목해 이를 ‘협조적 제국주의’라고 불렀다. 특히 그는 유신 정부가 협조적 제국주의 체제에 종속적으로 순응했다고 봤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은 서구 열강의 지지와 묵인 하에 벌어졌고 승리했다. 그 과정에서 일본은 제국주의 일원으로 뿌리내렸다. 서구 열강과의 협조체제는 공고해졌고, 그 여세를 몰아 1910년 조선을 식민지로 빼앗았다. 역내의 첫 번째 악연, 한·일 간 갈등의 역사가 시작됐다.

국제연맹 탈퇴하며 열강에 선전포고

1차대전 이후 일본은 국제사회의 주요 멤버로 부상하면서 협조적 제국주의의 종속적 파트너이기보다 서구 열강과 대등한 관계를 원했다. 행동으로 먼저 나타났다. 바로 만주사변이다. 국제사회가 일본의 돌출행동을 비판하자 일본은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한다. 서구 열강과의 협조체제는 깨지고 일본은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나아갔다. 중국을 사실상 반식민지로 지배함으로써 역내의 두 번째 악연, 중·일 간 적대적 관계가 본격화됐다.

메이지정부의 길은 유신, 즉 외세에 대항해 자존 자립을 모색하기 위한 새로운 모색이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전쟁의 길로 변질되고 말았다. 메이지유신은 근대 동아시아에서 이웃나라 간 악연의 씨앗으로 작동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악연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적 트라우마로 남았고, 원인제공자인 일본에 대한 증오와 갈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부국강병 외길로만 달려온 메이지일본의 유산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규슈=글·사진 조용래 대기자 jubi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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