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 ‘평양선언’ 비준 강행, 남북 합의 못 박기

문재인 대통령이 23일 청와대에서 의사봉을 두드리며 국무회의를 시작하고 있다. 국무회의에서 9월 평양공동선언과 판문점선언 군사분야 이행합의서 비준안이 심의·의결됐고, 문 대통령은 이를 재가했다. 국회 비준동의 절차를 생략하고 비준한 것이다. 이병주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평양 방문에서 합의한 9월 평양공동선언과 4·27 판문점선언 군사분야 이행합의서를 비준했다. 국회 비준동의 절차를 밟고 있는 판문점선언과 달리 평양선언은 이를 생략하고 즉각 비준한 것이다.

청와대가 사상 첫 남북 정상 합의 비준에 나선 것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번복됐던 남북 합의를 불가역적으로 못 박기 위해서다. 하지만 판문점선언과 평양선언의 차이가 분명하지 않은데도 비준을 밀어붙이면서 남북 관계 과속 우려가 확산되고 보혁 갈등도 재점화될 조짐이다.

문 대통령은 23일 평양선언과 군사분야 이행합의서 비준안을 전격 재가했다. 이날 국무회의에서 비준안이 심의·의결된 직후다. 통상 국무회의 의결 후 재가까지 2∼3일 정도가 소요되지만 청와대는 이 시기를 대폭 앞당겼다. 비준안은 관보에 게재되는 대로 발효된다. 군사분야 이행합의서는 북측과 문서를 교환한 뒤 관보에 게재될 예정이다.

문 대통령은 “남북 관계 발전과 군사적 긴장 완화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를 더 쉽게 만들어 촉진시키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라며 비준 배경을 설명했다. 이어 “우리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는 길일 뿐 아니라 한반도 위기 요인을 없애 우리 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며 “무엇보다 그동안 불이익을 받아왔던 접경지역 주민들에게도 가장 먼저 혜택이 돌아가고, 북한 주민의 인권을 실질적으로 증진시키는 길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청와대가 평양선언 비준으로 남북 정상 합의를 제도화·법제화하려는 것은 이들 합의가 더 이상 번복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다. 이는 북한이 그동안 지속적으로 요구해온 부분이기도 하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계속 미뤄지면서 연내 종전선언이 어려워질 가능성 때문에 남북 관계 개선의 고삐를 더욱 죄려는 포석으로도 읽힌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판문점선언과 평양선언 등에서 남북 간 합의한 사안을 이행하기 위해 비준 절차를 밟는 것”이라며 “서로 약속 시한에 맞춰 합의를 이행한다는 차원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말했다.

남북관계발전법은 남북 합의에 ‘중대한 재정적 부담’이 있을 경우 국회 비준동의를 거치도록 했다. 법제처는 앞서 이 같은 부담이 판문점선언에 포함된 만큼 그 후속 성격인 평양선언은 비준동의 사항이 아니라는 해석을 통일부에 보냈다. 하지만 평양선언도 독립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고, 경제·관광공동특구 조성 등 재정 부담이 있는 사업도 명기돼 있다.

김 대변인 역시 ‘판문점선언 국회 비준동의 무산 시 평양선언 중 재정 투자 사업도 무산되느냐’는 질문에 “평양선언은 판문점선언을 이행하는 성격도 있지만 그 자체로 독자적인 선언이라서 이 문서 자체로 효력이 발생할 것”이라고 답했다. 이를 두고 판문점선언의 국회 비준통과를 포기하고 평양선언 비준으로 대체하려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온다.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은 국무회의 뒤 기자들과 만나 “과거에도 원칙과 선언적 합의에 대해서는 (국회 비준동의를) 받은 건 없다”며 “추후 새로운 남북 분야별 합의들이 중대한 재정적 부담을 만들 때 국회 비준동의가 해당하는 것이지 원칙과 방향, 선언적 합의에 대해서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번 비준 절차는 문 대통령의 유럽 순방 기간 청와대 민정수석실 중심으로 전격적으로 추진된 것으로 알려졌다.

강준구 기자 eye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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