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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희망의 언어로 짚은 이 시대 사회 문제

2016년 10월 9일(현지시간) 미국 대선을 앞두고 열린 도널드 트럼프(왼쪽)와 힐러리 클린턴 간의 TV 토론. 트럼프는 당시 토론장을 계속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녔다. 리베카 솔닛은 당시 상황을 복기하면서 이렇게 적었다. “(트럼프는) 선거 기간 내내 많은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그 속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참을 수 없이 화가 나는 듯했다.” AP뉴시스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가 있는 건 아니다. 여성 민주주의 기후변화 불평등 같은 각양각색 이슈를 깊숙하게 파고든 글이 차례로 등장한다. 저자의 명성을 모르는 독자라면 우선 그의 필력에 감탄하게 될 것이다. 날카로운 필치로 세상의 환부를 베고 찌르고 도려내는 솜씨와 선명하게 당대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실력은 그 누구와 견줘도 부족함이 없으니까.

책을 펴낸 리베카 솔닛(57)은 미국의 어기찬 페미니스트이고,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내는 에세이스트이며, 1980년대엔 환경운동과 반핵운동에 뛰어들었던 활동가다. ‘맨스플레인(man+explain)’이라는 단어를 세상에 퍼뜨린 주인공이기도 하다. 남성이 여성을 상대로 시시콜콜 훈계하는 행위를 일컫는 이 단어는 그의 작품을 통해 페미니즘의 간판 키워드로 자리매김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그를 세계의 진보를 대표하는 ‘저항의 목소리’라고 치켜세우기도 했었다.

‘이것은 이름들의 전쟁이다’는 그가 펴낸 신작이다. 제목만 보면 무슨 뜻인지 감이 잡히지 않을 테니 일단 제목 얘기를 하는 것으로 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자.

언어의 위기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상대적으로 강조점을 두고 있는 내용은 언어의 위기를 다룬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겪는 위기 가운데 하나가 언어의 위기”라고 규정했다. 세태를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해석하려면 정확한 이름을 붙이는 게 중요하다는 주장이 등장하는데, 그는 이런 비유를 통해 그 이유를 뚜렷하게 드러낸다.

“질병에 이름을 붙이면, 같은 질병을 겪는 사람들의 공동체와 접촉할 수 있고 스스로 그런 공동체를 꾸릴 수도 있다. 명명은 해방의 첫 단계다. …유력 지도자들이 비밀리에 저질러온 짓을 정확히 호명하는 행위는 종종 그들의 사임과 권력 이동으로 이어진다.”

기후변화를 다룬 챕터에서도 비슷한 당부가 이어진다. “기후변화는 지구적 규모의 폭력이다. 인간에 대한 폭력일 뿐더러 동식물에 대한 폭력이다. 일단 우리가 이것을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면, 그때부터 우리는 비로소 우선순위와 가치에 대해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저자의 이런 주장이 호소력을 갖는 건 그가 자신의 많은 전작들을 통해 치열하게 조탁한 언어가 갖는 힘을 증명해낸 적이 있어서일 게다. 그의 글은 느리게 읽히지만 천천히 스미는 문장으로 구성돼 있다. 자주 밑줄을 그으면서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게 그의 작품이다. 책머리엔 그가 이번 책을 통해 무엇을 강조하고 싶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등장한다.

“언어를 정확하고 조심스럽게 쓰는 것은 의미의 분열에 대항하는 방법이자 우리가 사랑하는 공동체를 격려하고 우리에게 희망과 전망을 불어넣는 대화를 독려하는 방법이다. 모든 것을 그 정확한 이름으로 부르는 일, 이것이 내가 이 책에서 하려고 애쓴 일이다.”

트럼프가 만드는 난장판

어쩌면 많은 이들에게, 특히 미국 독자에게 가장 통쾌한 재미를 선사하는 대목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일 듯하다. 저자는 화려한 필력을 바탕으로 트럼프의 막말과 기행을 마음껏 비아냥대고 비꼬면서 통렬한 비판을 늘어놓는다.

“(트럼프는) 난장판을 만들고, 그 난장판을 내버려두고 떠나서 더 많은 싸구려 보석을 움켜쥐고 가는 곳마다 폐허를 남겼다. 그는 위대한 건설자가 될 것이라고 했으나 실제로는 대체로 파괴자였다. 그는 건물과 여자와 회사를 손에 넣은 뒤 그것들을 다 똑같이 다루었다.”

“그의 비밀이 어찌나 많이 새어나가는지, 그의 집무실이 베르사유의 분수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도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절벽에서 발을 내디뎠고, 지금 자유낙하 중이라는 사실을. 그가 착지할 지점에는 똥 무더기가 기다린다. 모두 그의 똥으로 이루어진 똥 무더기다.”

하지만 이런 인신공격성 이야기만 나열한다면 이 책을 소개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저자의 날카로운 펜촉이 가닿는 지점을 통해 우리는 그동안 허투루 여겼던 어떤 진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힐러리 클린턴과 트럼프가 맞붙은 지난 미국 대선을 복기한 부분이 그렇다.

저자는 당시 클린턴이 감수해야 했던 비판들을 되돌아보면서 미국 사회에 뿌리내린 여성 혐오의 시선을 부각시킨다. 예컨대 클린턴은 너무 욕심이 많다는 식의 지적을 받곤 했는데, 선출직 공무원이 되려는 사람에게 이런 야망은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남성이라면 지적받지 않았을 부분을 놓고 언론은 여자가 너무 욕심이 많다는 식으로 떠들어댔다.

클린턴의 낙선을 놓고서도 많은 사람들은 그 이유가 클린턴의 잘못 탓이라고 주장했다. 백인 노동자 계층을 설득하는 데 소홀했다거나, 여성 유권자의 지지를 더 이끌어냈어야 했다는 식의 주장이 대표적이었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목소리에 반기를 든다. 책에는 “(클린턴을 비판하는) 그들은 그들 자신을, 유권자들을, 체제를 비판하지 않았다”고 적혀 있다.

순진한 냉소주의를 경계하라

저자는 이 시대 우파 이데올로기를 “정신 나간 자유지상주의”라고 규정한다. 공동체의 가치를 별것 아닌 것으로 깎아내리는 태도도 강하게 비판한다. 그는 “우리는 함께 하나의 복잡한 체계를 구성하는 점들이고, 하나의 거대한 뇌에서 딸깍거리는 시냅스들”이라고 썼다.

하지만 그의 안타까움이 더 묻어나는 건 냉소주의자를 향한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책에는 “순진한 냉소주의”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이 용어는 과거에 우린 실패했고, 현재에 할 수 있는 게 없으니, 미래도 비관할 수밖에 없다는 태도를 의미한다.

“냉소주의자는 자신이 속지 않고 멍청하지 않다는 점을 무엇보다 자랑스러워한다. …순진한 냉소주의가 걱정스러운 것은 그것이 과거와 미래를 납작하게 만들기 때문이고, 공공의 담론에 참여할 동기는 물론이고 지적인 대화에 참여할 동기마저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냉소주의를 타파하는 데서 새로운 미래를 여는 예광탄을 쏠 수도 있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단단한 냉소주의를 깨뜨리는 방안은 무엇일까. 저자의 처방은 다음과 같다. ①무엇이든 발생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반응하라. ②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 수 없을 때가 많다는 사실을 인식하라. ③앞으로 벌어질 일은 축복과 저주의 혼합일 테고 상당히 긴 시간에 걸쳐서 펼쳐지리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의 책은 많은 이들의 가슴에서 꺼져가고 있는 희망의 불씨를 풀무질할 것이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무엇을 하는가는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믿는가에서 시작된다”고, “그 시작은 가능성에 마음을 열고 복잡성에 관심을 두는 것”이라고 말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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