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철학자 헤겔은 신문 구독이 “현대인의 일상적인 기도”라고 했다. 우리가 합리적인 판단과 선택을 하는 데 신문 기사가 큰 도움을 준다는 것을 전제한 말이다. 신문을 숭배했던 헤겔의 수사가 지금의 뉴스 소비자들에게 얼마나 지지를 받을 수 있을까. 우리 시대 최고의 지성으로 꼽혔던 움베르토 에코(1932∼2016·얼굴)가 이 주제를 파고들었다.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소설가이자 기호학자였던 에코는 한 신문사 편집부를 무대로 생애 마지막 소설 ‘제0호’(Numero zero·견본호)를 썼다. 구상은 2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에세이 ‘나는 독자를 위해 글을 쓴다’에서 “신문을 창간하려는 사람들이 견본호에서 어떻게 특종을 ‘창조’할 수 있을까 실험하는 상황을 생각했다”고 했다.
소설의 시점은 이탈리아에서 부패 척결운동인 ‘깨끗한 손’이 진행됐던 1992년. 싸구려 글쟁이인 주인공은 창간을 준비하는 신문사에서 일하게 된다. 신문사 배후에는 막대한 자금력을 가진 세력가가 있다. 그의 목적은 신문 발간을 빌미로 최고위층에 접근하는 것이다. 이 신문의 제호는 ‘도마니’(domani·내일).
한 기자는 도마니의 창간 준비호 격인 ‘제0호’를 만들면서 무솔리니의 죽음을 둘러싼 음모론을 추적한다. 취재 중 기자는 흉기에 찔려 숨진다.
에코는 신문의 배후 세력가로 ‘미디어 재벌’ 출신의 정치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82) 전 총리를 염두에 뒀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 소설은 ‘깨끗한 손’ 이후 보수 우파인 베를루스코니가 지도자가 된 현실을 풍자하면서 개혁적인 이탈리아의 ‘내일’을 기대했던 작가의 실망을 담고 있는 셈이다.
에코는 1960년대부터 언론의 악덕에 관해 글을 써왔고 저널리즘을 숙고했다. 그는 “내가 칼럼을 쓰면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소설을 내면 모두 관심을 보인다”고 했다. 말하자면 이 책은 그가 천착한 주제 ‘올바른 저널리즘’을 묻기 위해 쓴 것이다. 어떤 이는 ‘제0호’를 언론학과에서 교재로 사용하자고 제안했단다.
언론이 해서는 안 될 일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그의 책이 얼마나 생생하게 황색 저널리즘의 폐단과 악습을 묘사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SNS나 모바일 메신저에 넘쳐나는 ‘가짜뉴스’에 자주 눈살을 찌푸리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거리를 준다.
에코가 과거에 낸 책에 비하면 훨씬 읽기 쉽다.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의 진자’ 등은 복잡한 내용과 각주 때문에 끝까지 읽기 힘들다는 독자들의 푸념이 많았지만 이 책은 담백하고 간결한 기사체다. 에코는 ‘트위터 문체’를 사용했다고 표현했다. 이야기는 음모론에 스릴러 요소가 가미돼 상당히 긴장감 있고 재미있다.
다만 고고한 역사 뒤편으로 들어가 마법처럼 이야기의 실타래를 푸는 전작을 추억하는 독자라면 아쉬울 수 있다. ‘제0호’는 추락하는 이탈리아의 정치 현실과 언론 상황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생전에 이 책과 관련한 인터뷰에서 사회와 언론에 이런 주문을 했다.
“음모론은 우리를 책임감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음모는 사회의 편집증이 된다. …언론은 사람들이 가짜와 조작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