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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베이비박스 논란’ 유엔 간다

서울 관악구 난곡동 주사랑공동체교회 담벼락에 마련된 베이비박스. 작은 문을 열면 CCTV와 온열장치가 설치된 작은 공간이 나온다. 민간에서 운영하는 베이비박스는 불법이지만 비밀출산제가 도입되지 않은 한국에선 여전히 미혼모·부의 ‘마지막 선택지’로 여겨진다. 국민일보DB


국내 시민단체들이 ‘베이비박스’ 운영에 대한 부정적 의견을 담은 보고서를 유엔에 제출하기로 결정한 것으로 확인됐다. 베이비박스가 아동 인권을 침해한다는 취지다. 그간 베이비박스를 둘러싼 찬반 논란 속에서도 정부가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민간단체들이 대신 나선 셈이다.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유엔이 한국 정부에 권고사항을 전달하면 정부도 베이비박스 논란을 더 이상 외면할 수 없게 된다.

24일 국제아동인권센터 등에 따르면 국내 시민단체 40여곳이 참여하는 유엔아동권리협약 한국NPO연대는 이 같은 내용의 제5, 6차 민간보고서를 이달 말 유엔아동권리위원회에 제출하기로 했다. 협약 가입국은 6∼7년마다 국가보고서와 민간보고서를 제출해 국내 아동 인권 현황을 알리고, 아동권리위는 이에 대한 우려와 제언을 담은 권고사항을 해당 정부에 전달한다. 보고서에 베이비박스 관련 내용이 담긴 건 처음이다.

한국NPO연대 보고서에는 ‘대부분의 경우 베이비박스 아동은 부모를 알 수 있는 권리가 배제되며, 출생신고 되기까지 100일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는 내용이 명시됐다. 또 ‘대한민국은 현재 아동유기를 예방하거나 유기되는 아동을 보호하기 위한 공적 역할은 부재한 상황이다. 매년 출생신고가 되지 않고 발견되는 아동이 200~300명에 이르며, 민간에서 운영하는 베이비박스가 아동보호를 위한 대안이 되는 현실’이라는 내용도 담겨 있다.

논의 과정에서 일부 단체들은 “무책임한 비판”이라며 강력 반발한 것으로 알려졌다. 논의 초기에는 보고서에 ‘베이비박스를 폐기해야 한다’는 문구까지 넣기로 했지만 격론 끝에 철회했다고 한다. 한국NPO연대 관계자는 “베이비박스가 최선의 해결책은 아니지만 현재로서는 대안이 없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고 했다. 미혼모·부 지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베이비박스마저 폐기할 경우 아동의 생명권이 심각하게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수년째 되풀이돼온 베이비박스 찬반 논란이 재점화된 셈이다. 그간 일부 아동인권단체들은 베이비박스가 영아 유기를 조장하고 아동에게서 ‘친부모를 알 권리’를 박탈시킨다고 비판해 왔다. 그러나 사회적 낙인이 두려운 미혼모·부들에게는 베이비박스가 최후의 보루여서 오히려 생명권 보호 역할을 한다는 주장도 많았다.

전문가들은 논란이 계속된 데에는 정부 책임이 크다고 지적한다. 정작 책임지고 대책을 마련해야 할 정부 차원에서는 별다른 논의가 없었다는 것이다. 김도경 한국미혼모가족협회 대표는 “결국 떳떳하게 아이를 낳고, 경제적 어려움 없이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사회가 아니기 때문에 베이비박스가 출현한 것”이라며 “그렇다면 정부가 나서서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 해외에는 국가가 나서서 베이비박스를 운영하거나 아예 비밀출산제를 도입한 사례도 많다. 비밀출산제는 실명 출생신고를 할 수 없는 처지의 부모에게 익명 출산을 허용하는 제도다. 프랑스는 베이비박스를 금지한 대신 비밀출산제를 도입했고, 독일은 임신갈등상담소를 운영하며 출산 상담·지원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올해 초 비밀출산제와 긴급아기보호소 도입을 골자로 한 법안이 발의됐지만 계류 중이다.

정부가 베이비박스 ‘불법’ 논란에 모호한 입장만 취해온 데 대해서도 “책임을 민간에 떠넘기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현재 국내에서 운영되고 있는 베이비박스 2곳에 대해 정부는 “합법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별도 조치는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해 왔다.

그러는 사이 국내 3번째 베이비박스 설립이 목전에 있지만 논란은 여전할 전망이다. 국민행복실천운동본부 등 시민·종교단체들은 부산에서 ‘라이프박스’라는 이름으로 영유아 보호시설을 운영한다는 계획을 최근 확정했다. 관할 구청 관계자는 “베이비박스가 불법이라는 정부 입장은 변함이 없다”면서도 “(베이비박스가 설립되면) 우리가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을지는 검토해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병수 국제아동인권센터 사무처장은 “국제사회는 베이비박스를 권장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민간에서 베이비박스를 운영하는 나라도 찾아보기 힘들다”며 “(이번 보고서는) 우리나라가 전반적으로 제도적 측면에서 답보 상태란 걸 인정하는 꼴”이라고 말했다.

이재연 기자 jay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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