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① 미국 : 사회연대로 진화하는 미투
② 일본 : 불모지에 부는 변화의 바람
③ 스웨덴 : 성 역할 탈피 성중립교육
④ 영국 : 임금격차 해소 ‘페이 미투’
⑤ 한국 : 활발한 여성주의운동과 과제
“점점 더 많은 이가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고, 또 변화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목격한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결국 세상은 변할 거라 확신합니다.”
미투 운동의 현장을 직접 목격한 그의 두 눈에는 신념이 비쳤다. 수십년 여성 인권을 위해 일해 온 그에게도 미투 운동은 여태 경험 못한 ‘혁명’이었다.
국민일보는 지난 24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DC에서 에밀리 마틴(사진) 여성법률센터(NWLC) 교육·직장 부문 부회장을 만났다. 그는 미투 운동의 성과와 미래를 언급하면서 “여전히 할 일이 많다. 변화가 계속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마틴 부회장이 몸담고 있는 NWLC는 미투 운동의 대표 결과물로 꼽히는 ‘타임스 업(Time’s Up)’의 법률구조기금을 실질적으로 운영하는 대표적 여성단체다. 여성법률센터는 40년 넘게 여성의 법적 권리를 위해 활동해 왔다. 마틴 부회장은 20년째 여성단체에서 활동 중이다.
타임스 업이 직장 내 성폭력 문제에 초점을 맞췄다면 NWLC는 보다 전반적인 여성 성폭력 이슈와 제도 개선을 다루고 있다. 의회와 백악관을 대상으로 관련 연방법이 통과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미투 운동 이후 NWLC 등 미 시민단체들은 정치권과 협력해 11개 주와 2개 도시에서 직장 내부 성폭력사건 공개를 사측이 금지하지 못하도록 법률을 제정하도록 했다. 성폭력 생존자들이 직장 내에서 고립되지 않도록 하는 게 목표다. 최근엔 사측으로부터 강요된 합의를 방지하고 차별금지 훈련을 의무화하는 법안도 추진 중이다.
마틴 부회장은 “성폭력 가해자 처벌에만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생존자들이 원하고 필요한 게 뭔지 파악해야 한다”면서 “생존자가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돌아가도록 돕는 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학교 성폭력이 발생했을 때 가해자 처벌은 물론 생존자가 학업을 계속할 수 있도록 제도적 도움을 주는 것이다.
미국 사회가 미투 운동의 불을 댕겼지만 이른바 ‘백래시(backlash)’ 현상은 피할 수 없다. 백래시는 사회·정치적 변화로 기득권층의 영향력이 약해질 때 나타나는 반발심리나 행동을 뜻한다.
한국에서 논란이 됐던 소위 ‘펜스 룰’ 역시 미국에서도 흔하다. 지난 2월 여성단체 린인 조사에 따르면 여성 직원 교육을 꺼리는 남성 간부의 수는 16%로, 예전보다 3배 이상 증가했다. 여성 동료와의 회식 또는 출장에 대해 부정적인 답을 한 사례도 늘었다.
마틴 부회장은 “미투 운동을 깎아내리는 식으로 남성을 보호하겠다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면서 “남성도 역시 성폭력 피해자가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성폭력 고발이 일어났을 때 이를 밝힐 공정한 절차를 마련하는 게 장기적 관점에서 모두에게 도움 되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펜스 룰의 등장에 대해서도 “직장 내 성폭력 교육이 필요하다는 걸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이어 “서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집단학습을 해야 모두가 같은 규칙을 공유해 편안히 일을 할 수 있다”면서 “고용주들은 남성들이 (성폭력을 할 수 있다는) 공포로 여성과 일하지 않는 걸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고, 동시에 여성 상사를 늘리는 것도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투 운동의 발원지인 미국의 지도자는 역설적이게도 ‘안티 페미니스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다. 트럼프는 미투 운동을 겨냥한 백래시를 사실상 주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교 시절 성폭력 미수 의혹이 있는 브렛 캐버노를 연방대법관에 임명한 트럼프는 “남성으로 살기 무서운 시대”라고 말해 논란을 자초했다.
마틴 부회장은 “미투 운동이 확산된 이유 중에는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에 대한 반동으로 만들어진 여성들의 에너지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트럼프의 대통령 취임 다음 날 워싱턴DC에서 벌어졌던 행진과 이민법 개정 반대, 교사 파업 등 각종 시위에서 여성들이 선두에 섰다. 11월 6일 실시되는 중간선거는 미 여성운동 진영에 중요하다. 마틴 부회장은 “이번 선거에서 사상 최대의 여성 당선자가 나온다면 이는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미투 운동은 세계로 퍼졌지만 더욱 진화된 사회연대가 다른 나라의 여성운동 진영과 직접적인 연계로 이어지지는 않고 있다. 국내 문제에 집중하다보니 해외 단체와 연대하는 일이 많지 않았던 것이다.
마틴 부회장은 타임스 업이 앞으로 해외 여성운동 진영과의 협력을 계속 강구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미투 운동을 더욱 발전시키고 국제적인 여성운동 움직임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여성, 소수인종, 어린이 등 성폭력에 취약한 이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자는 차원이기도 하다.
워싱턴=조효석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