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곡은 시대다] 권력에 의해 붕괴된 청년문화의 처절한 묘비명


 
한국 포크 음악의 수준을 크게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는 가수 송창식. 한국적인 멋이 깃든 그의 음악은 1970년대 이후 수많은 한국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국민일보DB




1975년은 70년대 한국 청년문화의 비극적인 극점이었다. 당시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감수성은 좁은 캠퍼스를 뛰쳐나와 한 나라의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최인호의 소설, 이장호 김호선 하길종의 영화, 그리고 셀 수도 없는 젊은 통기타 음악인들의 노래는 고도성장의 그늘에서 억압으로부터의 탈출구를 찾고 있던 부글거리는 욕망을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그러나 노래의 경우 이 비등점은 불행하게도 너무나 급작스럽게 파국으로 이어졌다.

75년 유신 정권은 예술문화윤리위원회를 통해 ‘대중가요 재심의 원칙과 방향’이라는 제목의 ‘가요규제조치’를 선포했다. 440여곡의 노래와 방송을 전격적으로 금지하는 탄압의 칼을 빼든 것이다. 이 칼이 겨냥한 주요 표적은 통기타와 로큰롤의 기수들이었다.

‘사전심의’라는 유순한 이름으로 포장된, 대중문화에 대한 사전검열만으로는 캠퍼스의 울타리를 넘어 대중음악 시장으로 거침없이 진군해가고 있는 청년문화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해졌다고 판단한 것이다. 박정희정부는 전방위적인 ‘규제’를 아무런 주저 없이 선택했다. 하지만 이 금지조치는 다분히 자의적이며 나아가 표적 사정에 가까운 것이었다.

가령 전해 가을 ‘미인’ 신드롬을 불러일으키며 한국 음반 산업을 구원한 영웅 대접을 받았던 신중현의 거의 모든 노래가 소급 적용돼 금지곡이 됐다. 4년 전에 발표된 ‘거짓말이야’ 같은 노래들까지 ‘사회 불신감 조장’ 운운하는 딱지를 붙여 방송과 음반시장에서 교살시켰다. 가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미인’ 역시 석연치 않은 이유, 곧 (원작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대중들이 이 노래의 가사를 저속하게 바꿔 부름으로써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억지춘향적인 죄목을 부여해 금지시켰다. 이것이 어떻게 노래를 만든 이의 책임이란 말인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국민가요’를 만들라는 국가 시책에 불손하게도 불응한 신중현에 대한 예술적 처형의 스텝을 밟기 시작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 그리고 실제로 그 처형은 75년 말 대마초 파동으로 완결된다.

가요사의 클래식이 된 ‘고래사냥’

박정희 정권은 이미 74년 무더기 구속 사태를 불러온 민청학련 사건에서 이성을 상실했다. 이들은 자신에게 동조하지 않는 시민들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했다. 73년 일본에서 중앙정보부 공작원들이 벌인 김대중 납치사건부터 민심은 점점 험악해지고 있었다. 가요규제조치의 밑그림이 되는 75년 봄의 긴급조치 9호의 발동은 이 정권의 정치적 정당성의 균열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거의 착란에 가까운 광기가 지배한 75년의 봄, 신직수가 지휘하는 중앙정보부는 전해의 민청학련 사건을 넘어서는 최악의 참사를 저지른다. 민청학련의 배후 집단으로 인혁당(인민혁명당) 조직을 지목해 재판에 회부했고 그중 8명을 사형시켰다.

이 사건의 판결과 집행은 지금까지도 대내외적으로 ‘사법살인’으로 비난받고 있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회는 75년 4월 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했다. 특히 뉴욕타임스는 주일 미국 대사를 역임했던 에드윈 라이샤워의 기고를 통해 박정희의 이른바 한국적 민주주의는 사실상 조지 오웰의 1인 전제정치이며, 미국은 한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삭감해야 한다고 보도했다. 미국 주요 매체들은 유신정권의 일련의 폭압을 북한과 구별하기 힘든 독재로 규정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박정희에 대한 미국의 입장이 비판적으로 선회하는 변곡점이 됐다. 실제 이듬해 등장한 지미 카터 민주당 정권은 박정희의 폭압에 대해 공공연히 경고했으며 이는 박정희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실제 사형이 집행된 인혁당 사건 연루자 8명의 면면을 보면 경북대 학생회장 출신의 30대 초반 여정남을 제외하면 평균 나이가 40대 중반이었다. 세상은 얼어붙었다. 이제 정권에 대한 반대는 구속 정도가 아니라 죽음을 의미했다.

이 어둠을 뚫고 75년 개봉관에서 25만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 영화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 하길종 감독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최인호 원작)에서 음악을 맡았던 이가 통기타 군단의 선두주자 송창식이었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왜 불러’(송창식 작사·작곡)와 ‘고래사냥’(최인호 작사·송창식 작곡), 그리고 ‘날이 갈수록’(김상배 작사·작곡) 같은 노래를 선보였고, 이 곡들은 영화의 흥행을 뛰어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둔다.

영화는 유신 시대 캠퍼스 청년들의 상처 입은 비망록이었다. 기존의 배우를 거부하고 오디션을 통해 철저히 신인배우들을 캐스팅해 만든 이 작품은 신선한 시도로 가득한 영화였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가혹하게 이뤄진 검열의 가위질로 스토리의 전개가 이어지지 않을 만큼 상처로 얼룩진 아픔의 작품이기도 했다. 그런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감독은 다양한 발언을 행간에 은유적으로 심었다. 젊은 관객들 또한 장면 하나하나에서 시대의 가슴 아픈 표정을 발견했고 공감했다.

최인호(원작)-하길종(감독)-송창식(음악)으로 이뤄진 청년문화 트리오 편성은 이미 전해에 한국영화의 세대교체를 알리며 역대 흥행기록을 다시 쓰게 만든 ‘별들의 고향’의 후속 사건이었다. ‘별들의 고향’ 또한 최인호-이장호-이장희라는 트로이카 체제에서 탄생했는데, 이 두 작품 모두 최인호가 담당했다는 것은 70년대에 그가 지닌 대중적 영향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를 단숨에 알려준다. 그는 이 영화의 주제가 중 한 곡의 작사까지 맡음으로써 문학사와 영화사뿐만 아니라 한국 대중음악사에서도 독특한 지위를 남긴다.

하지만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송창식이 만든 두 개의 노래 ‘왜 불러’와 ‘고래사냥’이다. 이 두 노래 역시 곧 금지곡이 되는 운명을 피하지 못하지만 ‘왜 불러’는 당시 TV 주간 순위 프로그램에서 5주 이상 1위를 기록하며 기염을 토했고, ‘고래사냥’은 영원한 시대의 클래식이 되었다.

조용필에 견줄 만한 유일무이한 존재

60년대 말 트윈 폴리오라는 신선한 듀오로 한국 통기타 문화의 새벽을 장식했던 송창식은 그러나 불우한 2인자였다. 시인 윤동주 가문의 일원이자 명문대 의대생이며 지적인 미남형인 윤형주가 어린 여성 팬들의 주목을 독차지했다. 가정형편 탓에 대학에 진학하지 못했던 송창식은 대학가 문화가 핵심인 청년문화에서 비주류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윤형주가 솔로로 독립하면서 홀로 남겨진 송창식의 앞날은 암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싱어송라이터로 거듭나면서 급격한 성장을 거듭했다. 73년 ‘한번쯤’을 히트시키며 어제의 파트너가 누리는 스타덤보다 더 높은 곳으로 비상했다. 그리고 이 영화와 함께 그는 70년대 청년문화가 낳은 젊은 거장의 영광을 스스로 쟁취한다. 73년부터 86년까지 13년간 송창식이 만든 디스코그래피는 단순한 통기타 음악을 넘어 록과 국악, 클래식을 종횡무진한 대가의 행보였다. 그에게 견줄 만한 유일한 대중음악가는 가왕 조용필뿐이다.

젊은 송창식의 고갱이는 이 ‘바보들의 행진’ 사운드트랙과 3년 뒤 발표한 ‘사랑이야’를 담은 78년 앨범이다. 이 음반의 노래들은 지금 들어도 가슴을 뛰게 만드는 마력이 있다.

그 숱한 명곡 중에서 행진곡 스타일의 독특한 드럼 서주로 시작하는 ‘고래사냥’은 당시 대학의 청년 지식인들이 안고 있던 절망과 희망을 도도하게 포착한 절편이다. 이 곡은 권력의 강압적인 조치에 의해 붕괴하게 되는 청년문화의 운명을 극적으로 암시했다.

특히 전반부의 서술적인 12마디, ‘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 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는 곧바로 ‘퇴폐’와 ‘자학’의 낙인을 받게 되는 빌미를 제공하긴 했지만, 70년대의 내면적인 풍속도를 압축적으로 형상화한 것이기도 했다. 강세와 매듭 없이 이어지는 이 지속 선율은 주류 대중음악에 횡행했던 상투적인 운문 형태를 전복시키는 랩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수출 100억 달러와 국민소득 1000달러’라는 국가적 환상을 이 노래는 우회적으로 질타했다. 그것은 비겁한 ‘현실도피’가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상상력의 결과였다.

‘고래사냥’은 80년대에 배창호 감독에 의해 안성기 김수철 주연의 영화로 다시 태어나 성공을 거둔다. 지금은 ‘7080’이라는 기호로 묶이고 있지만 70년대 세대와 80년대 세대의 문화적 성향은 매우 다르다. 그러나 ‘고래사냥’만큼은 ‘70’과 ‘80’을 한 줄로 엮는 거대한 문화적 약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송창식(1947∼)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모친도 가출해 힘든 유년기를 보냈다. 작곡가 이건용, 지휘자 금난새 등과 서울예고를 같이 다녔지만 대학 진학은커녕 고등학교마저 마치지 못하고 중퇴했다.

통기타 하나를 메고 동가식서가숙하다가 음악감상실 세시봉에서 조영남을 만나 트윈 폴리오로 데뷔를 하게 된다. 1970년 자작곡 ‘창밖에는 비오고요’를 통해 솔로로 데뷔해 셀 수 없는 명곡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 비에 관한 노래가 많은 게 특징이다.

83년 ‘우리는’과 ‘푸르른 날’ 같은 대작을 거쳐 사실상의 마지막 앨범이 된 86년 앨범에서 그는 대중음악가가 어떻게 예술성을 획득할 수 있는지를 선연하게 보여줬고, 이후엔 사실상 작품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 뒤의 긴 침묵의 이유를 아는 사람은 없다.

<강헌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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