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클어진 영혼’들의 행복 낙원… 치매 환자 위한 네덜란드 공동체 마을

네덜란드 베스프 북쪽 외곽에 위치한 호그벡 마을의 전경. 이곳에 머물고 있는 중증 치매 환자 150여명은 일상생활을 영위할 권리를 존중받는다. 거주자들은 산책과 목욕, 음식 만들기 같은 활동을 최대한 도움 없이 수행한다. 사진 속 노인들이 햇볕을 쬐며 담소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평화롭다. 비비움 제공
 
호그벡 마을의 일상. 한 거주자가 마을 내 바에서 자원봉사자와 음료를 마시고 있다. 거주자들이 짝을 이뤄 자전거를 타는 모습. 고령의 거주자가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있다(위 사진부터). 비비움,한국언론진흥재단 제공








‘백발이 성성한 것만도 불효막심한데 어머니를 안에 두고 밖에서 문을 잠그고 있습니다. 저는 이제 어머니 아들도 아니고 불효자식은커녕 아예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짐승이 되고 말았습니다.’(소설 치매전쟁 중) 자전적 이야기를 전한 작가는 과거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방에 가뒀던 것이 회한으로 남아 어머니의 유골상자를 곁에 두고 지내야 했다고 고백했다.

치매는 힘든 병이다. 환자는 물론 가족도 고통을 겪는다.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처럼 치매에 걸린 부모나 배우자를 돌보는데 지친 이들은 결국 격리를 결정한다. 결말은 비극적이다. 치료제가 없기에 결국 환자는 그렇게 죽음을 맞는다. 치매와 일상생활에는 등가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사회적 인식은 환자와 가족에게 절망을 더한다.

네덜란드인 레질라(가명)씨도 그랬다. 8년 전 공식적으로 치매 판정을 받은 남편은 시간이 지나면서 증세가 악화되며 낮밤 가리지 않고 집을 나갔다. 길을 헤매던 남편은 경찰이나 때론 이웃의 손에 이끌려 나타났다. 남편과 그의 일상은 무너졌다. 하지만 레질라씨는 방문을 잠그지 않았다.

현재 그의 남편은 ‘일상생활’을 하고 있다. 구스타프 말러와 지아코모 푸치니의 음악을 좋아하던 남편은 매일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 가끔은 극장에 가서 공연도 본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도 있다. 인지하고 기억하지 못해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발병 전 누렸던 그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증세가 호전되지는 않지만 빠르게 나빠지지도 않는다. 레질라씨는 일주일에 3∼4차례 남편이 있는 호그벡(Hogeweyk) 마을을 찾아가 안부를 확인한다. 남편이 이곳에 입주한 3년 반 전부터 부부는 안정을 찾았다.

네덜란드 호그벡 마을은 치매환자들을 위한 군락이다. 비영리 단체 비비움(Vivium)이 운영하는 곳으로 ‘치매 환자도 평소 누리던 일상을 영위해야 한다’는 것을 기치로 내걸었다. 치매 요양병원 간호사였던 이본 반 아메롱겐이 2009년 중앙정부와 지역기관의 협조를 받아 네덜란드 베스프 북쪽 외곽에 이 마을을 세웠다.

약 1만5000㎡(5000평) 규모의 마을에는 150여명의 중증 치매 환자가 머문다. 의료진 및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300명 이상의 직원이 그들을 돕는다. 이곳에서 그들은 환자가 아닌 거주자로 불린다.

호그벡에 입주할 수 있는 자격은 중증 치매환자에게 주어진다. 네덜란드에서는 요양이 필요하다고 느끼면 홈닥터에게 문의한다. 홈닥터의 추천과 전문기관 진단을 거쳐 요양등급을 판단 받는다.

지난달 24일 찾은 호그벡 마을은 잘 짜인 계획도시처럼 보였다. 몰에는 슈퍼마켓과 레스토랑 등이 있었고 극장, 분수대, 정원도 보였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큰길에는 음악감상실과 진료실, 미용실 등이 모여 있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끈 것은 저마다의 속도로 활발하게, 도움 없이 걷고 있는 노인들이었다. 일부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호그벡 마을은 치매환자들이 보통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마을 안에서 환자들은 5∼6명씩 나뉘어 23가구에서 모여 산다. 가구마다 직원 1∼2명이 함께 머문다. 호그벡 마을의 특징은 입주자들이 ‘생활양식’에 따라 모여 산다는 것이다. 마을의 설립자 반 아메롱겐은 “생활 패턴과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함께 사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갈등이 발생할 확률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각 집은 7개의 라이프스타일로 나뉘어 구성됐다. 활동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을 위한 ‘도시적’ 스타일과 손으로 작업하는 걸 즐겨하는 이들을 위한 ‘수공업적’ 스타일, 집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가정적’ 스타일이 있다. ‘전통 네덜란드’ 스타일과 음악, 미술 등 활동을 즐겨하는 ‘문화적’ 스타일, 종교생활을 중시하는 ‘기독교적’ 스타일도 있다. 과거 네덜란드의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이민자들을 위한 양식도 꾸며져 있다.

가족 등 입주자를 잘 아는 사람이 작성한 설문지를 토대로 생활양식을 추천하면 입주자와 보호자가 둘러본 후 가장 적합한 형태를 고른다.

각 거주자들은 자신에게 익숙한 생활 습관을 유지한다. 강제로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하거나 잠자리에 들지 않는다. 방문을 원하는 가족들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다.

마을에는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시설들이 마련돼 있다. 거주자들은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카페에서 차를 마신다. 카트를 끌며 장을 보기도 하며 헤어숍에서 미용을 한다. 120석 규모의 극장에는 계절마다 전문 음악인 등이 찾아와 공연을 한다.

호그벡에서는 요리, 음악 연주 및 감상 등 거주자들이 취향에 따라 여가를 즐길 수 있도록 사교클럽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 각 모임이 열리는 공간은 향수를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꾸며졌다. 이날 들여다본 요리 클럽에는 팬케이크를 굽는 팬, 설탕 등을 담는 원형 모양의 통 등 거주자 세대가 자주 사용하던 조리기구가 비치돼 있었다. 모차르트 음악감상실(음악클럽)에도 축음기 등 옛 소품이 쉽게 눈에 띄었다.

반 아메롱겐씨는 “인간은 다른 이와 어울려야 하는 사회적 동물이다. 치매환자들도 인간으로 그럴 권리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거주자들은 다른 입주자와 어울리며 때론 산책, 목욕, 음식 만들기와 같은 일상 활동을 최대한 독립적으로 수행하고 있다”며 “이는 치매 진행 속도를 늦추는데 도움이 된다고 본다”고 말했다.

호그벡에서 종일 누워 지내는 거주자는 없다. 아무리 증세가 심한 환자라도 특수 제작된 휠체어를 타고 밖을 다니며 햇볕을 쬔다. 호그벡에서 환자가 침대에 누워서 보내는 날은 죽음을 맞이하기 하루 전 정도라고 한다.

호그벡 마을에서는 무엇보다 중증 치매 환자가 의료진 및 자원봉사자와 동거하는데 불편함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다. 의사와 간호사는 가운을 입지 않고 거주자도 환자복을 입지 않는다. 또 거주자의 행동에 대한 개입은 최소화한다. 길을 잃거나 혼란을 느낄 때만 자원봉사자들이 도움을 준다.

호그벡 마을은 네덜란드의 다른 요양시설처럼 세금으로 운영된다. 거주자들은 소득에 따라 한 달에 최소 500유로(약 65만원)에서 최대 2500유로를 주 정부에 낸다. 반 아메롱겐씨는 “국가에서 주는 기초연금이 850유로가량 되기 때문에 최소금액인 500유로를 제외해도 350유로가 생활비로 남는다”며 “이용에 큰 부담이 따르지 않을 것”이라 말했다.

호그벡 마을은 이미 수년 전부터 치매 요양의 모범 사례로 꼽히면서 전 세계에서 벤치마킹을 하고 있다. 이탈리아 등 유럽은 물론 뉴질랜드와 호주 미국에 이미 호그벡을 모델로 삼은 치매요양소가 건립됐다. 중국에서도 설립을 고려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반 아메롱겐씨는 호그벡 마을을 치매요양의 보편적 모델로 보지는 않는다고 했다. 그는 “한국과 네덜란드의 문화와 가치가 다르듯이 각 나라의 환경이 다르다”며 “중요한 것은 기존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고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치매 환자도 일상생활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인식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암스테르담=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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