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집에서 자고 올게요.” 딸이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1980년 5월 22일, 광주시내의 한 도로에서 아직 여고생의 앳된 모습을 벗지 못한 손모(당시 20세)씨가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손씨의 모습은 처참했다. 온몸이 두부처럼 짓이겨 있었고, 왼쪽 가슴에는 계엄군이 휘두른 대검에 찔린 상처가 있었다. 성기에는 여러 발의 총탄이 관통한 흔적이 있었다.
가족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일요일 교회에 갔던 손씨의 남동생도 계엄군에 끌려가 닷새 동안 온몸에 멍이 들 정도의 모진 구타를 당하고 22일 돌아왔다. 남동생은 후유증으로 간질 증세를 보였고, 군인만 보면 싸우려고 덤벼들었다. 딸의 죽음, 아들의 후유증을 동시에 겪어야 했던 손씨의 아버지는 1년 후 세상을 떴다. 어머니 역시 6년간 반신불수의 몸으로 고생만 하다 아버지 곁으로 떠났다. 한 가족의 삶은 그렇게 무너졌다.
국가인권위원회와 여성가족부, 국방부가 공동 구성·운영한 ‘5·18 계엄군 등 성폭력 공동조사단’은 지난 6월 8일부터 시작한 활동을 31일 종료했다. 손씨의 죽음은 조사단이 파악한 문헌에서 발견된 사례였다. 이외 조사단은 성폭행과 성추행 성고문 등 여성인권침해행위 69건을 확인했다. 상담·접수 12건, 광주광역시 보상심의자료 45건, 문헌·방송자료 등 12건 등이었다. 국가 차원에서 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에 의한 성폭행 사례를 확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계엄군의 끔찍한 성폭행 피해 사례는 중복을 제외하고 17건으로 파악됐다. 상담·접수로 7건, 기존의 자료·문헌으로 10건이 확인됐다. 피해는 시민군이 조직화되기 전인 5월 19∼21일에 집중됐다. 금남로 등 광주시내에서 자행되던 범죄는 광주교도소 인근 등 외곽지역으로 확대됐다. 시위에 참가했던 여성뿐만 아니라 10대 학생부터 30대 주부, 직장인까지 성폭행의 피해자가 됐다. 여성 한 명을 여러 명의 군인이 집단 성폭행하기도 했다. 성추행 피해자 가운데는 임신부도 있었다.
피해자들은 3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피해 기억 속에 갇혀 고통받고 있다. 조사단이 진행한 상담에서 이들은 “지금도 군복만 보면 속이 울렁거린다”고 토로했다. “스무 살 그 꽃다운 나이에 내 인생이 멈춰버렸다”며 말하기도 했다. 정신과 치료를 받았지만 아직도 성폭행을 당하던 순간이 잊히지 않는다는 절규도 있었다.
500여명의 구술 증언이 채록된 자료에는 “속옷 차림의 여성을 대검으로 찌르거나 희롱했다”는 내용이 담겼다. 의료 활동 기록 중에 옷이 찢긴 채 병원을 방문한 여성 사례도 있었다. 조사단이 접수한 목격자 진술 중에는 “여고생이 강제로 군용트럭에 태워져 가는 모습을 봤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조사단은 면담한 피해자 가운데 심리치료를 원하는 2명을 전문 트라우마 치유기관으로 연계했다. 하지만 대다수는 “아픈 기억을 다시 꺼내고 싶지 않다”며 치료를 거부했다.
이번 조사에서 가해자나 가해 부대가 추정되는 사례는 성폭력 7건이었다. 조사단은 국가정보원, 기무사, 특전사 등 20개 기관·부대별 자료와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 병력배치, 부대이동 등을 확인했다. 작전 당시 입었던 복장의 무늬, 소총 등 장비, 장갑 착용 여부와 계급장 등을 체크하며 가해자를 조사했다.
그러나 개인정보 열람 제한, 조사기간의 한계에 부딪혔다. 인권위 관계자는 “일부는 가해자가 소속됐을 것으로 추정되는 부대 인원 명단만 확보한 상황”이라며 “남은 조사는 앞으로 진상규명조사위원회에서 해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사단은 국가의 공식사과, 심리치유제도 마련, 진상규명, 가해자 처벌 등이 뒤따라야 한다고 제언했다. 진상규명특별법상 조사범위에 성폭력을 명시하고, 향후 출범할 5·18민주화운동 진상조사위에 성폭력 사건을 전담하는 소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최예슬 기자 smart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