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 중 10년째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질병은 암이다. 통계청의 보고에 따르면 암에 의한 사망률은 인구 10만명당 153.9명으로 60.2명인 심장 질환의 2배를 넘어선다. 반면 암 진단과 치료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암환자의 장기생존율 급증하고 있다.
암환자의 생존율 증가는 단순히 생존이 아닌 삶의 질을 강조하는 추세로 변화하고 있다. 미국 종합 암 네트워크(NCCN)에서는 암환자들의 스트레스 관리를 위해 디스트레스(distress)를 필수적으로 측정도록 권고하고 있다. 디스트레스는 ‘심리적 고통이 함께하는 스트레스’라는 의미이며, 주로 암환자의 정신적 고통을 나타내는 용어로 환자 삶의 질과 직결된다. 미국 존스 홉킨스(Johns Hopkins) 암센터에서는 암환자의 3명 중 1명이 디스트레스를 겪고 있다고 보고했다.
국내의 경우에는 미국보다 암환자의 디스트레스 유병률이 더 높다. 국내 암환자의 40% 이상이 심리적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이들 중 대다수는 불안장애, 우울장애, 수면장애,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에 준하는 증상을 보였다. 또 암이 없는 일반인에 비해 정신질환의 유병률이 3배 이상 높았다.
암환자의 정신질환은 단순히 삶의 질에만 영향을 미치지 않고 신체 증상 악화로 이어진다. 우울, 불면, 불안은 통증, 식욕부진, 구역감, 피로 등의 신체증상을 악화시키고, 환자의 치료의지에도 영향을 미쳐 치료의 순응도가 떨어지게 한다. 뿐만 아니라 치료받지 않은 정신건강질환과 디스트레스는 면역 기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쳐 암의 진행을 촉진한다. 실제로 우울증이 있는 폐암 환자들이 더 일찍 사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암환자들은 수술, 항암, 방사선 치료와 같은 적극적인 치료가 끝난 이후에도 정신건강문제로 고통을 겪는 경우가 많다. 재발에 대한 두려움과 암 치료 후유증, 신체 기능의 저하들은 암환자의 정신건강을 악화시키는 중요한 원인이다.
암환자의 정신건강의학과 관리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국내 유수의 대학병원에서는 암환자들의 정신건강관리를 위한 클리닉 진료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암환자들은 이러한 서비스를 모르는 경우도 많으며, 알고 있다 해도 정신건강의학과에 대한 편견이나 집도의가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권유할 경우 환자와의 관계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해 진료가 늦어지기도 한다. 또 암환자의 정신건강문제를 단순히 개인의 취약성으로 여기거나 정신건강의학과 약물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의 장벽이 된다.
암환자들의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에 대한 만족도는 매우 높은 편이다. 우울·불안·불면과 같은 정신건강의학과 증상뿐만 아니라 통증, 식욕부진, 구역감과 같은 신체 증상의 호전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또 일부의 환자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와의 상담을 통해 절망을 더 나은 삶으로 바라보는 놀라운 경험을 하기도 한다. 암과 같은 극한 역경 이후 인격적으로 성장하는 ‘외상 후 성장(post-traumatic growth)’ 과정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암환자의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했던 보호자들도 이후 변화된 환자의 모습을 보고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적극 권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암환자의 정신건강 관리는 더 이상 선택이 아니라 삶의 질과 암 후유증 예방관리를 위해 필수다. 정신증상의 고통을 암 치료의 당연한 결과로 여기지 말고 정신건강의학과의 도움을 받아 극복해야 한다.
김원형 <인하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