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자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공식이 깨진다.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한 자율주행 시스템도 운전자가 될 수 있다. 자율주행 중 사고가 났을 때 제조사에 책임을 물어야 할지, 탑승자에게 책임을 물어야 할지도 명확해질 전망이다. 정부는 자율주행차 시대를 대비해 관련 규제를 미리 혁파하기로 했다.
이낙연 국무총리는 8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국정현안점검조정회의를 열고 ‘자율주행차 분야 선제적 규제혁파 로드맵’ 구축안을 논의·확정했다. 현재 기술이 도달한 수준인 ‘부분자율주행’(레벨2)부터 ‘완전자율주행’(레벨5)까지 단계별로 핵심규제 30개를 선정했다.
운전 주체를 다시 정립하는 게 우선과제다. 현행 도로교통법은 사람이 하는 운전을 전제로 깔고 있다. 난폭운전 금지, 안전운전 의무 같은 조항은 모두 사람이 주체다. 반면 자율주행차는 사람 대신 시스템이 운전을 한다. 각종 의무, 책임부과 주체를 다시 설정해야 하는 이유다. 정부는 내년 말까지 운전자를 다시 정의하는 작업을 마칠 방침이다.
또 정부는 자율주행 시스템의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소홀히 해 발생할 수 있는 사고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2020년까지 자율주행 시스템 관리의무를 신설할 계획이다. 자율주행 중 운전 제어권이 사람에게 넘어오는 기준도 새롭게 만든다. 예를 들어 기능 고장이 감지되면 사람이 운전을 맡는 식이다.
‘뜬구름’ 같지만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정부는 지난 3월 도로교통법을 개정하면서 자율주차 시 운전자의 이석(離席·자리를 뜸)을 허용했다. 자율주차를 할 때 운전자가 자동차 밖에 있어도 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자율주행 중에 벌어진 사고의 민형사 책임소재를 명확히 하는 작업도 진행된다. 사고 원인이 자율주행 시스템의 결함인지, 운전자의 관리소홀·부주의인지에 따라 책임부과 대상·수준을 다시 정하는 것이다. 자동차보험 제도도 여기에 맞춰 달라진다.
자율주행 기술이 한층 발전한 미래 환경을 대비한 규제 혁파도 이뤄진다. 정부는 운전자가 자율주행 시스템의 개입 요청에 대응하지 못해도 주행이 가능한 ‘고도자율주행’(레벨4) 상황을 전제로 중기과제를 선정했다. 레벨4의 경우 특정 구간과 특정 기상상황을 제외하고 자율주행이 가능한 단계로 탑승자의 자유도가 높아진다. 예를 들어 운전 중 휴대전화·영상기기 사용 등이 허용될 수 있다. 2대 이상의 자동차가 앞뒤 또는 좌우로 줄지어 통행하는 군집주행도 가능해진다. 자율주행 화물차의 군집주행이 허용되면 물류 효율성이 높아질 수 있다.
아예 사람의 개입이 필요 없는 완전자율주행(레벨5) 시대가 오면 변화는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운전석의 위치를 고정할 필요가 없어 현재의 차량장치 기준을 완전히 바꿔야 한다. 침대형 차량 같은 새로운 자동차가 등장할 수 있다. 차량을 직접 모는 운전면허 외에 자율주행기능이 적용된 차량을 운전할 수 있는 간소면허도 탄생할 전망이다. 과로, 질병 등의 운전결격 사유도 완화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2020년 연구·기술발전 진행 상황을 파악해 로드맵을 재설계하고 중장기 과제를 보완할 계획이다.
세종=정현수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