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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수의 감성노트] 자기 초점적 주의


 
김병수(정신과 전문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만 붙들고 있어서는 행복해질 수 없다. 나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한다고 자신을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사람의 눈에는 결점과 약점이 크게 보인다. 불안하고 우울하면 더 그렇다. 불안은 결함에 선택적 주의를 기울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울증 환자에게 10분 동안 자신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백발백중 더 깊은 우울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 외모나 행동에 과도하게 주의를 기울이는 현상을 일컬어 자기 초점적 주의(Self-Focused Attention)라고 한다. 외부가 아닌 자신에게서 비롯된 정보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을 말한다. 자기 초점적 주의는 부정적 정서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자기 초점적 주의가 강해지면 우울과 불안이 필연적으로 따라붙는다. 건강한 사람이라도 몇 분간 자기 손등만 뚫어지게 쳐다보면, 괜히 개미가 기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거나 평소에 보이지 않던 이상한 점이 보인다며 염려하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우울해질수록 열등감과 콤플렉스가 잘 보이고, 이걸 생각할수록 기분이 더 나빠지는 것도 마찬가지 현상이다.

뉴욕대 연구 결과를 보면 자기 초점적 주의와 정서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실험 참가자에게 바흐의 ‘브란덴부르크 협주곡’을 들려줘 긍정적 정서가 유도되도록 했을 때와 프로코피에프의 ‘몽골 치하의 러시아’를 들려주고 부정적 정서를 유도했을 때 자신에 대한 생각을 각각 얼마나 하게 됐는지 비교했다. 전자의 음악으로 즐거운 기분을 느꼈을 경우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빈도가 줄어든 반면, 후자의 음악으로 슬픈 감정을 일으켰더니 자기에 대한 생각이 늘어났다. 긍정적 정서는 자기를 벗어나게 만들고, 부정적 정서는 자신에 대한 생각을 자석처럼 끌어당긴다는 것을 보여주는 결과였다.

활기찰 때는 새로움을 추구하게 된다. 스트레스 받을수록 멀리 있는 지인에게서 가까운 친구로, 친척보다는 가족에게로 관심의 폭이 좁아지다가 우울해지면 나와 관련된 생각만 떠오른다. 우울증 환자가 치료받고 호전되면 “지금까지 집착했던 내 문제가 이제는 남의 일처럼 느껴져요”라고 말하게 된다. 자기 문제에 밀착하면 우울해지고, 자신과 심리적으로 거리를 두면 우울에서 벗어난다. 이런 현상을 두고 “자아와 인지적으로 융합(Cognitive Fusion)되어 있다” 혹은 “자아와 탈융합(Cognitive Defusion) 되었다”라고 부르기도 한다.

요즘 들어 자꾸만 ‘나는 누구인가’라는 생각 속으로만 파고든다면 ‘내가 우울해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자기감정을 점검해 보는 게 좋다. 우울한 상태에서 나만 들여다보고 있으면 우울감은 더 커지고 부정적 사고는 강화된다. 이럴 땐 ‘기분을 전환하라는 신호구나’라고 해석해야 한다. 외모와 재능에 대한 불만만 떠오른다면 ‘아, 이건 친구 만나서 수다 떨고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들으라는 메시지구나’라고 다르게 받아들여야 한다.

나에게 “당신이 좋아하는 책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빠지지 않고 꼽는 것이 후지와라 신야의 ‘돌아보면 언제나 네가 있었다’이다. 이 책에는 자살을 생각할 만큼 절망에 빠진 한 여성의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임신을 하게 한 남자가 무책임하게 떠나버린 뒤 방황하던 여자가 갑자기 진통을 느끼고 길거리에 쓰러지고 마는데, 주위 사람들이 구급차를 불러주고 인정 많은 주부가 병원에 같이 가줘서 무사히 출산하게 된다. 그녀는 태어난 딸의 얼굴을 보고 살아갈 힘을 되찾는데, 그 순간 몇 년 전에 자신의 손금을 봐줬던 점쟁이가 했던 말을 떠올린다.

“손금을 봐서 먹고사는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하는 것은 이상하지만, 자기 손금에 신경을 쓰고 있는 사람은 불행해집니다. 자기만을 생각하는 사람이란 그만큼 걱정거리를 안게 됩니다. 그러니까 손금에 연연하는 것을 졸업해야 해요. 그리고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세요. 그래야 살아갈 용기가 생겨요.”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만 몰두하면 불행해진다. 행복한 사람은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생각하고, 타인과 세상에 에너지를 쏟는다. 사람과 세상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면 생기를 잃고 만다. 살맛은 세상을 향해 나를 던져 넣을 때 생기는 법이다.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겠지만, 나를 둘러싼 지금 이 순간의 현실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인간은 자신을 벗어난 무언가에 헌신할 때 비로소 진정한 자기를 깨닫게 되는 존재니까 말이다.

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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