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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 칸타타] “성범죄 고발을 넘어 피해자와 교회 모두 치유·회복시키는 게 중요”

기독교여성상담소 채수지 소장이 최근 서울 충정로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두 손을 모은 채 상담 사역의 즐거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일이 교회 성범죄를 고발하려는 것을 넘어 피해자와 교회 모두를 치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강민석 선임기자
 
지난해 신학대 교수의 성폭력 사건 피해자 지원을 위한 기자회견에 나선 채 소장 모습. 기독교여성상담소 제공


기독교여성상담소 채수지 소장은 조용한 사람이다. 말소리가 조근조근하게 차분한 데다 제스처 또한 크지 않다. 가까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데도 귀를 쫑긋 세워야 하는데 그래서인지 오히려 그가 하는 말에 집중하게 된다. 그는 조용하지만 강인한 사람이다. 한국교회 내 굵직굵직한 성범죄 사건에 정면으로 맞서고 있다. 대체 어디서 저런 용기와 힘이 나올까. 채 소장을 최근 서울 충정로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에서 만났다.

고통받는 자와 함께하는 자

2년 전 서울 강남역 살인사건에 이어 올 초 미투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교회 내 성범죄가 속속 터져 나오고 있다.

최근엔 인천 대형교회 청년부 목사가 장기간 여성도들에게 접근해 친분을 쌓은 뒤 성추행과 성폭력을 저질렀다는 이른바 ‘그루밍 성범죄’ 의혹이 불거져 충격을 안겼다.

채 소장은 교회 내 성범죄가 일반적인 성범죄와 다르다고 했다. 복잡하게 꼬여있어 좀처럼 해결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교회에선 성범죄 사건이 불거지면 피해자 1인과 다수의 싸움으로 번지곤 해요. 보통 교회 여성도들이 피해자죠. 문제는 피해자가 2차 피해를 보는 일이 많다는 점입니다. 피해자가 거짓말쟁이나 미친 사람으로 내몰리기도 하고 심지어 이단이라는 공격을 받기도 합니다. 명예훼손으로 고소를 당하기도 하고요.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겁니다.”

성범죄 피해를 보고도 제대로 인지하지 못 하는 일도 적지 않다. 목회자와 성도 사이라는 특수한 관계가 얽힌 상태에서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이 고단해 교회를 찾아온 여성도들이나 어린 나이 성도들이 주로 타깃이 된다.

“명백하게 강요된 상황에서 성관계를 맺었는데도 사무실에 찾아와 ‘제가 성범죄를 당한 게 맞나요?’라고 묻는 분들도 계세요. 몹쓸 짓을 당하고도 본인조차 헷갈리는 거죠.”

가해자는 이 점을 노린다. 신앙생활 도중 서로 감정이 싹터 생긴 문제라는 주장을 펼친다.

“교회에선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위치에 있어요. 성도들은 목회자의 말에 순종하기 마련이죠. 그러니 목회자는 성범죄를 저지르고도 성도들에게 사랑했을 뿐이라면서 책임을 회피하려고 합니다.”

교회 성범죄 피해자들의 대변인

기독교여성상담소는 1998년 한국여성신학자협의회 부설 기관으로 설립됐다. 교계 최초로 목회자의 ‘불륜’이나 ‘화간’으로 치부된 문제들에 대해 ‘교회 성범죄’라는 이름을 붙이고 대항했다. 채 소장은 정신분석 공부와 더불어 ‘상황신학’ ‘관계신학’을 배우면서 교회 성폭력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고 확신했다.

“공부할수록 성폭력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부장제와 같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와 깊숙이 연결됐다는 걸 알게 됐죠.”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2006년부터 정신분석 공부를 시작해 미국 공인 모던정신분석학회의 정신분석전문가가 됐다. 2010년엔 서울 노원구 새잎교회에서 공동목회를 하면서 정신분석심리상담소를 냈다. 성공회대학교 대학원에서 영성신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뒤 2016년부터 기독교여성상담소장을 맡았다. 지금까지 400건이 넘는 상담을 받아 그 중 80여 건을 교회 성폭력 사건으로 진행했다.

채 소장은 상담자들의 ‘대변인’으로 통한다. 뒤로 숨을 수밖에 없는 피해자들을 위해 기꺼이 전면에 나선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을 돕는 일이야말로 목회자로서의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믿는다. 신앙심 깊은 어머니 덕분에 이런 결심을 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언제나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셨어요. 기도의 든든한 후원이 있기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죠. 또 ‘죽으면 죽으리라’는 담대한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 오신 어머니의 신앙은 제 사역에 밑거름이 됐죠.”

떠들썩했던 교회 내 성범죄 사건들이 그를 거치며 사회 이슈가 됐다. 여론이 달궈지자 교단마다 대책 마련에 돌입했다. 법정에서도 유죄로 인정된 사건이 나왔다. 채 소장은 아직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피해자들이 많다고 보고 있다.

“다수의 피해자는 여전히 숨어있어요. 피해를 입고도 용기를 내지 못하고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이죠. 20년 전 사랑한다는 말에 속에 성폭행을 당하고도 평생 그 상처를 혼자서 안고 지낸 분도 계세요. 제가 그들의 지원군이 돼 희망을 드리고 싶어요.”

“피해자와 교회 모두 치유하는 게 꿈”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두려움과 불안, 외로움에 떨거나 자살 충동에 시달리는 피해자들을 곁에서 지켜보는 건 쉽지 않다. 교회 성폭력에 대한 교계의 낮은 인식도 문제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피해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고 각 교단에 꾸준히 진상조사와 대책을 요구했다. 진심은 조금씩 통하기 시작했다. 각 교단은 성폭력 문제를 신중하게 받아들이는 추세다.

“처음엔 무거운 발걸음으로 상담실을 찾았던 분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회복되는 걸 지켜보면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육체적 피해보다 더 큰 정신적 고통을 짊어지고 살았던 피해자들이 상담을 받으면서 치유되는 걸 보면 보람을 느낍니다.”

성폭력 피해자들과 함께하는 시간에는 인내와 끈질긴 희망이 필요하다. ‘좋은 치유자’가 되려면 내담자가 스스로 성찰할 수 있도록 기다려야 한다. 또 그들의 고통을 퍼내는 그릇을 지녀야 한다. 상담은 그래서 채 소장에게 예배처럼 신성한 만남이다. 하나님이 일대일로 자신을 친밀하게 만나주는 시간이다. 그는 상담자들과 공감하고 교제하면서 예수의 모습을 본다.

“내담자를 만날 때마다 다양한 모습으로 현현하시는 예수님을 뵙니다. 여기 오시는 분들은 제게 기대려 하지만 저 또한 여기 오시는 분들을 통해 제 삶의 치유를 경험하죠. 내담자들과 대화하면서 성령이 임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내면적 치유의 과정을 거치면 피해자들은 비로소 가해자를 용서할 마음을 갖게 된다. 상담 끝에 ‘제가 이렇게 가해자를 용서해도 되는 거예요?’라고 묻는 피해자들도 있다. 그럴 때면 “가해자를 용서하는 것과 별개로 교회 내 성범죄 근절을 위해 멈춰선 안 돼요. 함께 한국교회의 변화를 위해 힘을 내요”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그의 일은 교회 성범죄 고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교회 모두를 치유하고 그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려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채 소장은 로마서 5장 8절 말씀을 품고 산다고 했다. 좋은 상담자가 되려면 ‘승리와 부활의 예수님’만이 아닌 ‘고통받는 자와 함께하시는 십자가의 예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야 한다는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김상기 기자 kitt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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