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4시가 지났는데 은행 문은 열려 있었다. 지난 12일 저녁 7시30분 서울 종로구 KEB하나은행 광화문역 지점. ‘KEB하나은행 × BOOK BY BOOK(북바이북)’ 글씨가 적힌 하얀색 간판 아래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다. 이곳은 낮에는 은행과 북카페, 저녁에는 강연장으로 쓰인다. 은행 지점과 문화공간이 결합한 이른바 ‘컬처 뱅크’다. 이날은 ‘페미니즘과 기독교의 맥락들’이라는 책을 쓴 백소영 작가의 강연회가 열렸다. 이모(25)씨는 “은행 지점에서 이런 행사가 열린다는 게 놀랍다. 인테리어도 깔끔하고 광화문역과 가까워 너무 좋다”고 했다.
은행 지점은 ‘진화 중’
은행 지점은 치열한 생존 전쟁을 벌이는 중이다. 인터넷과 모바일이라는 디지털뱅킹의 거센 파도 속에서 차별화 방안을 찾고 있다. 동네에서 ‘목 좋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은행 지점들은 서점, 카페, 잡화점과 손을 잡고 고객을 불러 모은다. 은행 방문 경험이 없는 ‘스마트폰 세대’를 만나기 위해 무료 강연회를 열고 인기 가수를 초청해 콘서트를 개최하기도 한다. 오정근 건국대 금융IT학과 특임교수는 “은행이 목 좋은 곳에 점포를 열고 가만히 앉아 장사를 하던 시대는 이제 끝났다”고 말했다.
일단 ‘얼굴’부터 바꿨다. KB국민은행은 지난 4월 서울 홍대 앞에서 40년간 영업했던 서교동지점을 완전히 뜯어고치고 ‘KB락스타 청춘마루’란 이름을 붙였다.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이뤄진 건물에서 은행 업무를 볼 수 있는 건 자동현금입출금기(ATM) 밖에 없다. 나머지 공간은 카페와 갤러리, 세미나실, 루프탑 등으로 채웠다. 각종 전시, 문화강연 등이 연일 열리지만 입장료는 무료다. 대신 모바일뱅킹 애플리케이션 ‘KB스타뱅킹’ 이나 ‘리브(Liiv)’를 설치해 입구에서 바코드 인증 절차를 거쳐야 한다. 지난 9일 오후 8시, 이 곳에는 걸그룹 위키미키 멤버 김도연과 가수 폴킴이 진행한 ‘청춘드림 콘서트’를 보기 위해 100여명이 몰렸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등으로 정보를 얻고 초대권을 신청한 이들이었다.
변신의 출발점은 카페였다. 우리은행은 2016년 3월 커피전문점 폴 바셋과 손잡고 서울 동부이촌동지점에 ‘카페 인 브랜치’라는 복합점포를 열었다. 지점 일부를 내준 뒤 은행 영업시간에는 공간을 같이 썼다. 은행 영업이 끝나면 창구 쪽은 셔터를 내린 뒤 카페에서 나머지 공간을 썼다. 고객 호응이 높자 그해 6월 서울 잠실 롯데월드몰지점에 크리스피크림도넛 매장과 결합한 ‘베이커리 인 브랜치’도 들어섰다.
KEB하나은행은 지난해 말부터 ‘컬처뱅크’에 속도를 내고 있다. 공예품을 테마로 한 서울 서래마을지점(1호점)을 시작으로 광화문역지점(2호점)과 잠실레이크팰리스지점(3호점)을 특화점포로 바꿨다. 3호점은 잠실 일대 주부들을 겨냥해 ‘홈 가드닝 클래스’ 등 각종 문화 콘텐츠를 제공하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지난달 16일 서울 강남역지점에 온라인 편집숍 ‘29cm’와 제휴한 4호점을 냈다.
신한은행은 지난 4월 서울 홍익대 안에 지점을 개설하며 재학생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을 별도로 꾸렸다. 기존 창구업무의 90% 이상을 손님 스스로 할 수 있는 ‘디지털 존’도 설치했다.
오후 4시 넘으면 ‘죽은 공간’
은행 지점은 대부분 유동 인구가 많은 ‘목 좋은 길목’에 있다. 하지만 영업이 끝나는 오후 4시부터 지점 앞은 ‘죽은 공간’이 된다. 은행권 관계자는 “저녁 시간 이후 주변 상권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인식에 입주를 꺼리는 임대인도 있다”고 전했다.
특화점포는 ‘저녁 시간’을 새롭게 활용하는 데 초점을 맞춘다. 한 특화점포 담당자는 “문화형 점포 등이 고객 수를 대폭 늘렸다거나 수익을 크게 높였다는 등의 성과는 아직 뚜렷하지 않다”면서도 “고객 만족도가 높고 지역사회에 문화공간을 제공하며 따라오는 브랜드 이미지 강화 등의 효과는 매우 큰 것으로 조사됐다”고 말했다.
5대 시중은행의 특화점포는 현재 16곳이 넘는다. 은행들은 “앞으로도 더욱 늘리겠다”는 입장이다. 명절에는 고속도로 휴게소 등에서 대형버스를 개조한 ‘이동 점포’를 운영하거나, 외국인 근로자 밀집지역에선 일요일 영업을 하기도 한다.
모든 은행 지점이 변신하는 건 아니다. 디지털 금융거래가 큰 폭으로 늘면서 문을 닫는 점포가 훨씬 많다. 2015년 7446곳이었던 은행 점포는 2016년 7281곳, 지난해 6971곳, 올해 상반기 6788곳으로 줄었다. 건물 2층으로 밀려나는 것도 모자라 아예 없애는 것이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는 2009년부터 수익성과 고객 접근성이 낮은 지점 1600여곳을 폐쇄했다. 미국 씨티그룹도 전 세계 지점 숫자를 줄이고 있다.
디지털이 ‘은행 실종’ 초래하나
모바일뱅킹이 더욱 편리해지면 은행 지점은 완전히 사라질까. 전문가들은 “숫자가 줄 순 있겠지만 없어지진 않을 것”이라고 본다. 무엇보다 고객이 원하기 때문이다. 각종 설문조사에서 고령층과 자산가, 자영업자 등은 여전히 지점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엑센츄어는 “고객은 여전히 지점을 방문하고 대면 접촉을 원한다. 가장 선호하는 방식은 물리적 채널과 디지털 채널의 혼합”이라고 분석했다.
디지털화가 빨라지는 산업일수록 온라인과 오프라인 채널 모두 고객에게 동일한 서비스를 제공하는 ‘옴니채널(Omni-Channel)’ 강화가 필요하다는 진단도 나온다. 국제금융센터 강정현 연구원은 “금융소비자가 온라인이나 모바일, 오프라인 지점 등 어느 쪽으로 접근해도 동일한 서비스를 향유할 수 있도록 옴니채널을 구현해야 한다”며 “애플스토어처럼 향상된 디자인으로 은행 이미지를 지점에 투영할 필요성이 있다”고 조언했다. 디지털 전환은 ‘온라인이냐, 오프라인이냐’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양쪽 모두에서 발전된 서비스를 똑같이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글로벌은행들도 이런 관점을 바탕으로 전략을 짜고 있다. 미국 JP모건은 필라델피아, 델러웨어 등 약세 지역에 50개 지점 설립을 준비 중이다. 글로벌 컨설팅업체 맥킨지는 “지점은 은행의 신뢰와 신용을 쌓기 위한 핵심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양민철 기자 list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