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성규 기자의 걷기 묵상] 필사즉생


 
우성규 기자


가을 끝자락이다. 올해 유난히 화려했던 단풍도 이제 소임을 다하고 하나 둘 내려앉는다. 떨어지는 나뭇잎이 아쉽다면 주말 이곳을 찾아 걸으면 좋다. 단풍이 다 져야 시작되는 가을 나라. 밤의 밑바닥이 노란 곳이다.

서울에서 기차나 전철을 타고 1시간여를 달리면 온양온천역이다. 역에서 북쪽으로 언덕을 하나 넘고 강을 건너면 충남 아산 곡교천 은행나무길(사진)을 만난다. 1.7㎞ 제방을 따라 은행나무 365그루가 심어져 있다. 겨울까지 떨어진 은행잎을 치우지 않는 만추(晩秋)의 나라다. 낮에도 밑바닥이 노랗다.

온양온천역에서 곡교천까지 걸으면 30분 걸린다. 차를 타도 별반 차이가 없다. 10여m마다 교차로가 나오고 신호등이 차를 멈춰 세운다. 신호 대기 시간이 좀 길다. 택시라도 탔다면 너무 느긋해 손해 보는 기분이다. 그렇다고 택시 기사를 재촉해선 안 된다. 여기는 충청도. 이런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손님, 아 그리 급하시믄 어제 오시지 그랬슈.” 그래서 걷는 게 낫다.

노란 카펫이 깔린 길 위에서 사람들이 셀카를 찍느라 바쁘다. “어머, 이뻐죽겠네” “여기 은행은 냄새도 안 나네. 신기해죽겠어” 잘 들어보니 말끝마다 ‘죽겠다∼’ 타령이다. 이곳 출신 문학가인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저서 ‘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 사람들은 유난히 죽는다는 말을 많이 쓰지 않습니까.… 배가 고프면 배고파죽겠다고 하고 배가 부르면 이번에는 배불러죽겠다고 하는 사람들. 처음에는 그런 동족들이 싫었고 부끄러웠지요. 하지만 죽음은 삶의 극한 언어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의 라틴어)라는 것을 알았지요.”

곡교천 은행나무길 끝은 현충사 입구로 이어진다. 현충사 주차장엔 미국태권도협회(ATA)가 세운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 비석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요.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진리. 12척 전선으로 130여 왜선을 맞설 명량해전 전날 밤 이순신 장군이 난중일기에 남긴 기록이다.

활을 든 사림(士林)이었고 군인이자 시인이었던 장군은 죽음 앞에서 초연했다. ‘사생유명 사당사의(死生有命 死當死矣).’ 죽고 사는 일은 하늘에 달려 있고 죽게 되면 죽을 것이라는 말을 1597년 3월 정유재란 직전 선조가 역적 혐의로 죽이려 할 때 의금부 감옥에서 남겼다.

죽어야 사는 역설은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다.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돌아가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 삶은 죽음을 기억하고 곱씹을 때 더욱 소중하고 아름답다. 화려했던 단풍도 낙엽으로 땅에 떨어져 흙으로 스며들어야 찬란한 봄날 새싹으로 다시 움틀 것이다. 죽고자 하면 살 것이란 신앙을 길에서 배운다.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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