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범수(48)가 영화 ‘출국’에 출연한 이유는 “단순”하다. 주인공의 절절한 부성애에 연민을 느꼈다. 40대 가장 오영민. 그는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가족과 생이별을 하게 된다. “저도 아빠이다 보니 그 심정이 와닿더라고요. 이 사람 참 안 됐다, 안아주고 싶다.”
최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이범수는 “내가 솔로였다면 이 작품에 그만한 흥미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영민과 같은 두 아이 아빠 입장에서 보니 100% 이입이 되더라. 어떻게든 가족을 지키려는 영민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출국’은 1966년 납북 공작원의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다. 국내 입국을 금지당한 독일 유학파 마르크스 경제학자 영민은 자신의 학문이 북한에서는 높은 평가를 받는다는 북한 공작원의 말에 혹해 북한행을 택했다가 가족과 헤어지게 된다. 아내와 두 딸을 되찾으려 사투를 벌이지만 누구도 그를 도와주지 않는다.
이범수는 완벽하지 않은, 현실적인 아빠의 모습을 그려나갔다. 당연히 ‘다이하드’의 브루스 윌리스나 ‘테이큰’의 리암 니슨처럼 멋져선 안 됐다. “초등학생 아이의 운동회에서 사력을 다해 뛰는 아빠의 모습을 떠올렸어요.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다리에 힘이 풀려도, 우리 아이 기죽이지 않으려고 엄청난 에너지를 내는.”
상업적인 면을 고려하면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장편 연출이 처음인 신인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소규모 신생 영화사가 제작하는 저예산 영화. 흔히 말하는 ‘흥행 코드’가 전무했다. 그러나 노규엽 감독을 직접 만나고 나서 신뢰가 생겼다. 작품에 대한 고민의 흔적과 생각의 깊이, 삶을 바라보는 진지한 태도가 엿보였기에.
이범수는 “흥행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나”라며 “그렇다고 흥행만 좇을 순 없다. 내가 신인 시절 ‘네가 무슨 배우가 되겠냐’는 편견 어린 시선 속에 성장했듯, 진정성을 가진 신인감독에게도 기회가 주어져야 하고 누군가는 응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제작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루머에 시달리기도 했다. 박근혜정부 시절 모태펀드 지원 특혜를 받았다는 이른바 ‘화이트리스트’ 논란에 휘말린 것이다. 이범수는 “그런 목적성을 띤 작품이 아니란 건 팀원들이 다 알고 있었기에 흔들리지 않았다”며 “시간이 지나면 오해는 자연히 풀릴 것이라 생각했다”고 전했다.
가장 만족스러운 건 배우로서 지닌 욕심을 얼마간 해소했다는 것이다. “최근작에서 악역을 했던 터라 계속 비슷한 시나리오가 들어오고 있었는데, 이 작품을 보고 이상하게 끌리더라고요. 풍성한 감성이 담겨있어 욕심이 났어요. 나라는 사람의 기질이 그런 것 같아요. 익숙한 것보다 새로운 걸 찾죠.”
지금껏 이범수는 늘 그래 왔다. 진중한 성격의 그가 코믹한 이미지로 유명세를 얻었고, 달달한 멜로 작품으로 사랑을 받더니, 순식간에 강렬한 얼굴로 변신하기도 했다. 이범수는 “나도 몰랐던 나의 이면을 누군가 발견하고 그런 역할을 제안해준다는 건 매우 특별하고 감사한 일”이라고 했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이면이 또 있을까요?”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또 도전하실 테고요?” “그럼요. 저는 자유롭고 싶어서 배우의 길을 택했습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