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의 법관 대표들이 19일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사법농단 의혹에 연루된 판사들에 대해 “탄핵소추 절차까지 검토돼야 한다”고 뜻을 모았다. 법관이 다른 법관을 향해 탄핵 의견을 낸 것은 처음이다. 이들의 결의는 사법농단 의혹 사태의 또 다른 변곡점이 될 전망이다. 국회의 탄핵 논의도 급물살을 타게 됐다.
전국 법관 대표 119명으로 이뤄진 법관대표회의는 경기도 고양 사법연수원에서 2차 정기회의를 열고 ‘재판독립 침해 등 행위에 대한 우리 의견’을 결의했다. 이들은 결의문에서 “우리는 법원행정처 관계자의 행위가 징계 절차 외에 탄핵소추 절차까지 함께 검토돼야 할 중대한 헌법 위반행위라는 데 인식을 같이한다”고 밝혔다.
결의문에 적시된 문제 행위는 ‘특정 재판에 관해 정부 관계자와 재판 진행 방향을 논의하고 의견서 작성 등 자문을 해준 행위’다. ‘일선 재판부에 연락해 특정한 내용과 방향의 판결을 요구하고 재판 절차 진행에 관해 의견을 제시한 행위’도 헌법 위반 행위로 지적됐다. 이들은 다만 탄핵소추 대상 판사가 누구인지 이름을 특정하지는 않았다.
법관 대표들은 오후 1시부터 3시간 넘게 격론을 벌였다. 재적인원 119명 중 105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찬반 의견은 10표차로 팽팽히 맞섰다. 찬성 53표, 반대 43표, 기권 9표였다.
탄핵을 찬성하는 법관들은 ‘국민적 관심이 큰 사안에 대해 법원이 진정성을 보여줘야 한다’ ‘탄핵소추를 촉구하지 않는 것이 법관대표회의의 임무를 방기하는 것이다’ ‘탄핵 절차를 통해 법관에 의해 자행된 반(反)헌법적 행위에 대한 기준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편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탄핵 반대 의견을 낸 법관들은 ‘탄핵소추는 고도의 정치적 행위이므로 정치적 논쟁에 휘말리는 것은 옳지 않다’ ‘탄핵은 국회의 의무여서 법관대표회의가 탄핵을 촉구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결의안은 20일 김명수 대법원장에게 전자공문 형태로 전달된다. 법관대표회의가 국회에 결의문을 직접 전달하지는 않을 계획이다. 회의 관계자는 “법관대표회의는 기본적으로 자문기구”라며 “제3의 기관인 국회에 의결사항을 전달할 계획은 없다”고 설명했다. 김 대법원장은 조만간 공식 입장을 표명할 것으로 보인다.
법원 내부에서 탄핵 움직임이 시작된 것은 지난 9일 대구지법 안동지원 판사 6명이 집단행동에 나서면서다. 이들은 대구지법 대표법관 3명에게 법관 탄핵안을 발의해줄 것을 요청했다. 사흘 뒤 서울중앙지법 등 대표법관 12명이 잇따라 뜻을 같이하는 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날 회의장에서 최한돈(53·사법연수원 28기)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 등 12명이 발의해 공식 안건으로 채택됐다.
김 대법원장과 법관 대표 80여명은 회의 후 사법연수원 구내식당에서 비공개 만찬을 가졌다. 법관대표회의 관계자는 “식사 자리에서 결의안에 관한 대화는 없었다”고 전했다.
사법부 역사상 법관을 탄핵시킨 적은 없다. 1985년 국회가 고(故) 유태흥 전 대법원장에 대한 탄핵안을 발의했으나 부결됐다. 2009년 촛불집회 사건 재판에 개입한 신영철 전 대법관에 대한 탄핵안도 시한을 넘겨 자동 폐기됐다.
법원 내부에서 법관을 탄핵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 전례도 없다. 과거 여러 차례 사법파동 때 진상규명과 책임 추궁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법관들 스스로 탄핵이 필요하다고 천명한 적은 없다. 유 전 대법원장과 신 전 대법관 탄핵안은 국회가 선제적으로 나선 경우다. 법관대표회의가 탄핵소추 검토 필요성을 강조한 만큼 국회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는 탄핵소추안 발의도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한편 강제징용 소송 등 재판에 개입한 혐의를 받는 박병대 전 대법관이 이날 검찰 포토라인에 섰다. 사법농단 의혹과 관련해 검찰이 전직 대법관을 공개 소환한 것은 처음이다. 검찰은 재판개입과 법관사찰 등 혐의를 집중 추궁했다.
이가현 구자창 기자 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