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영옥의 지금, 미술] 보이지 않는 규율에 주눅든 도시, 그 ‘질서정연함’에 대한 도전

서용선 작가가 그린 도시에는 지하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이 자주 등장한다. 통제된 질서와 속도에 길들여진 도시 남녀들이 그곳에 있다. 미국 뉴욕의 지하철(위)이나 서울 강남 테헤란로 주변(아래)에서 그가 목격한 도시인들은 하나같이 타인에게 무관심하고 위축돼 있다. 작가 제공
 
획일화된 도시적 삶에 저항하는 듯한 퍼포먼스 사진 작품 앞에서 포즈를 취한 작가. 작가 제공


운전면허증을 따고 난생처음 운전에 나섰을 때 느꼈던 경이를 잊을 수 없다. 빨간불에 멈춰 서고, 좌측 깜빡이와 우측 깜빡이를 넣어 행선지를 미리 알려주는, 그 단순한 약속의 세계가 낳은 질서정연함이 놀라웠다. 교통순경의 수신호 따윈 필요 없었다. 보이지 않는 힘은 그렇게 도로 위를 세련되게 통제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거야말로 ‘규율권력’에 의해 ‘순응하는 신체’가 된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까. 프랑스 철학자 미셀 푸코(1926∼1984)는 저서 ‘감시와 처벌’에서 규율에 의해 개인을 통제하는 감시 사회의 도래를 통찰하며 규율권력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분리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도시는 그 규율권력이 거미줄처럼 뻗어 있는 곳이다.

도시의 삶을 그리는 작가는 많다. 서울역 앞 서울스퀘어 빌딩의 미디어 파사드(건물 외벽에 다양한 영상을 투사하는 것) ‘걷는 사람들’로 친숙한 영국 작가 줄리안 오피(60)도 그중 하나. 오피가 형상화한 도시 사람들은 마치 익명의 섬을 유영하는 것처럼 경쾌하다.

‘인문학적 성찰자’로 불리는 작가 서용선(65)이 포착한 도시의 풍경은 이와 정반대다. 푸코가 말하듯 행정적인 통제에 길들여진 ‘순응하는 신체’에 가깝다. 최근 대구 갤러리신라에서 막을 내린 개인전 ‘도시를 바라보는 현상학적 시선’에서 작가는 이런 성찰을 담은 신작을 내놨다. 최근 몇 년간 서울을 비롯해 미국의 뉴욕과 워싱턴 DC 인근 알렉산드리아, 독일 베를린 등 세계 주요 도시를 노마드처럼 떠돌며 그린 것으로, 그가 공통적으로 추출한 도시의 상징은 버스나 지하철이다.

뉴욕의 지하철 안. 제법 덩치가 큰 흑인 남자가 옹송그린 자세로 신문을 읽고 있다. 옆 빈자리가 넓은데 양팔도, 양다리도 어깨너비를 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가지런히 놓여 있다. 자세가 얌전하기는 입구 뒤쪽에 앉은 남자도 마찬가지다. 출입구 쪽에는 남녀가 다른 방향을 바라보며 무심히 서 있다. 이들에게 표정은 없다. 삶의 피로와 무관심이 흐를 뿐이다.

외국의 지하철이고 버스지만 우리의 도시라고 다를 바 없다. 한국은 어떤가. 수년 전까지 화제가 됐던 지하철 ‘쩍벌남(다리를 쩍 벌리고 앉은 남자)’ 이슈도 사라졌다. 순응하지 못한 ‘쩍벌남’은 ‘나는 자연인이다’를 외치며 산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른다. 또 어디든 스마트폰에 눈을 박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는데, 이조차 우리를 규율하는 속도의 족쇄다.

“도시의 삶에, 채소처럼 치이는 느낌을 받았어요. 압도적인 높이의 초고층 빌딩이 생겨나고 속도가 장악해버린 도시에서 사람들이 점점 위축되고 있다는 느낌 말입니다. 특히 뉴욕에선 지하철이나 버스 안이 서로 굉장히 조심해야 하는 공간이지요. 다양한 인종이 섞여 사니까요.”

또 다른 그림을 보자. 버스 좌석 뒤편에 안내 문구가 있다. 작가는 이 문구를 이상하리만치 또렷이 썼다. 비상시엔 이렇게 하세요, 담배는 피우지 마세요, 소곤소곤 말하세요, 뛰지 마세요…. 우리는 이처럼 무수한 금지어의 그물망에 갇혀 도시를 살고 있다. 전시장에서 만났던 작가는 “그만치 우리는 사전 지식에 길들여져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용선은 역사화가로 불린다. 계유정난, 동학혁명, 6·25전쟁 등 한국사의 굵직한 사건을 표현주의적 붓 터치와 왜곡된 형상, 강렬한 원색에 담아왔다. 서울대 교수였던 그는 작가의 길에 매진하기 위해 정년을 8년 남겨두고 미련 없이 강단을 떠나 화제가 된 바 있다. 오롯이 작가로만 살며 2015년 서울 금호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통해 관심사를 도시로 확장한 작품을 선보였다. 3년 만에 다시 내놓은 도시 풍경은 이전과 달라져 있었다. 특유의 원색의 강렬함은 사라졌다. 대신에 가라앉은 색이 들어앉았다. 분출하던 붓질은 정교해졌다. 선으로 잘 구획한 형태를 계산한 것 같은 색면이 채운다. 점점 길들여지는 도시인을 표현하기 위해 그의 조형 언어도 달라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이번 전시에서 흥미로운 시도를 했다. 처음 선보인 퍼포먼스 사진이다. 지인의 고교 동창 합창 동호회 회원들이 경기도 양평의 작가 작업실을 찾아왔다. 그는 그들에게 1m 간격으로 서서 한 방향을 바라보기를 주문했다. 자신도 그 안에 들어간 채 사진을 찍었다.

사진 속 중년들은 정년퇴직한 사람들이다.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길들여진 것처럼 수 십 년 몸담아온 조직에 익숙해졌던 그들은 새로운 모색을 두려워하는 신체가 됐다.

“하지만 인간의 몸이 가진 가능성은 무한해요. 인간의 직립성을 생각해 보세요. 일단 똑바로 서 있는 경험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내 몸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해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옆에 누군가 서 있다는 걸 자각하면 서로를 의지해 할 수 있는 것들이 더 많아지지 않을까요.”

이 연출 사진이야말로 작가가 회화에서 표현하지 못한, 수동적 신체를 벗어나기 위한 저항의 작업으로 비친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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