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난치병 환자의 이중고
선천성 또는 위·대장암 수술 중 전체 소장의 50% 이상 소실된 경우
고농도 영양수액 주사로 생명 연장
오랜 주사로 혈관 변형·패혈증 우려, 질병코드 없어 환자 수도 집계안돼
국내 시판 허가된 치료제는 연명수단에 불과한 TPN 대체 가능
산정 특례 못받으면 약값 年 3억
“지금으로선 생명을 이어가려면 주사로 영양분을 공급받는 방법뿐인데, 이마저 평생 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몸에 고농도 영양수액을 맞을 수 있는 혈관이 한정돼 있어 계속하면 혈관 변형이 자꾸 일어나 나중엔 주사 꽂을 곳이 없어질지도 몰라요. 영양을 공급받을 유일한 길이 없어지면 꼼짝없이 굶어죽어야 하는 거죠.”
희귀?난치병인 ‘단장(斷腸)증후군’을 앓고 있는 아홉 살 신모군의 어머니 A씨(38)는 아이 치료 과정에서 가장 힘든 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임신 27주에 태어난 신군은 2주 만에 소장(작은 창자)에 구멍이 뚫리는 천공이 생겨 두차례 장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미숙아에게 흔한 ‘괴사성 장염’(장이 썩어들어감)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신군의 소장은 25㎝밖에 남지 않았고 그 후유증으로 단장증후군 판정을 받았다.
신군의 어머니는 10년 가까이 아이의 투병과정을 지켜오며 그간의 어려움보다 앞으로 찾아올지 모르는 치료중단의 위협에 더 큰 고통과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안타까운 사정은 대부분의 단장증후군 환자와 가족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다.
단장증후군은 정부가 질병을 분류할 때 부여하는 질병코드 조차 없어 정확한 환자 수도 집계되지 않는다. 국내 환자들은 오로지 영양주사로 연명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행히 글로벌 제약사가 개발한 유일한 치료제가 최근 국내 처음으로 허가를 받았지만 출시가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어 아직 환자 치료에 쓰이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연간 3억원 넘게 드는 고가(高價) 약이어서 향후 판매된다 하더라도 제한적인 현행 건강보험 적용 기준 아래에선 대부분 환자들에게 ‘그림의 떡’이라는 지적이다.
영양수액, 환자들 ‘생명줄’
단장증후군은 선천적으로 혹은 수술받는 과정에서 전체 소장의 50% 이상이 소실된 경우를 말한다. 건강한 성인의 소장 길이는 평균 6m 정도지만 단장증후군 환자의 경우 보통 2m 이하다. 위와 대장 사이 길고 좁은 관인 소장은 대부분의 음식물이나 영양소가 소화 및 흡수되는 곳이다. 소장의 길이가 짧은 만큼 영양소 흡수가 충분치 못할 수밖에 없다. 정상적인 성장이나 생활 유지가 어렵다. 국내에서는 유병률 등 전국 단위 실태조사가 이뤄진 적 없어 진단과 치료에 어려움이 크다.
삼성서울병원 소아외과 이상훈 교수는 26일 “유전자 돌연변이로 인해 단장증후군을 갖고 태어난 극소수 어린이 환자를 빼면 대부분 수술 중 광범위하게 장을 절제한 결과 후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질병코드가 없기 때문에 의료계에선 단장증후군을 ‘달리 분류되지 않은 수술 후 흡수장애(질병코드 K91.2)'에 포함시켜 다루고 있다. 이 교수는 “이들 가운데 일부만 단장증후군 유병 인구로 추정되며 100∼20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될 뿐”이라고 했다. 어린이와 달리 성인의 경우 암 수술(특히 위·대장암) 후 소장에 문제가 생겨 장이 엉겨붙어 썩으면서 장을 잘라낸 뒤 단장증후군 발병 사례가 많은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국내 단장증후군 환자들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총정맥영양법’(TPN)에 의존하고 있다. 입을 통한 음식물 섭취가 어려워 정맥 주사를 통해 하루 필요한 영양분을 공급받는다. 가정에서 1주일에 5∼7일, 하루 10시간 넘게 영양수액을 맞아야 한다.
신군의 어머니 A씨는 “오랫동안 영양주사를 맞다 보니 아이가 음식 먹는 법을 거의 잊어버린 상태”라면서 “예전엔 안타까운 마음에 조금씩 음식을 먹여도 봤지만 흡수를 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먹는 양 보다 배출하는 양이 더 많은 것을 본 뒤로는 시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다른 환아인 11세 이모군 어머니 B씨는 “영양이 부족하기 때문에 또래보다 신체 발달이나 체력이 많이 떨어진다”며 안쓰러워했다.
오랜 영양주사에 따른 합병증이나 후유증 위험에도 노출돼 있다. 영양수액 주입을 위한 관 삽입 부위가 감염되면 패혈증 등으로 위험에 처해질 수 있다. 게다가 TPN은 고농도 영양수액이어서 일반 말초혈관 주사로는 주입이 불가능하다. 몸에서 좌·우 목과 어깨 부위 등 4곳에만 있는 굵은 중심정맥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감염으로 염증이 생기면 관 삽입이 가능한 중심정맥을 찾아 또다시 꽂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이 교수는 “어른의 혈관은 1∼2㎝로 굵지만 소아들은 5㎜로 좁기 때문에 관을 넣으면 혈관에 말썽이 생길 위험이 높고 어릴 때부터 관 삽입기간이 길수록 그만큼 쓸 수 있는 혈관이 소진될 가능성도 커진다”고 했다.
TPN으로 인한 삶의 질 저하는 환자와 가족 모두에 큰 부담이다. B씨는 “TPN 관을 몸에 꽂은 채 학교에 가야 하기 때문에 친구들과 운동도 잘 못하고 가족과 외식하는 등 평범한 일상을 아이가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이 가슴 아프다”고 했다. A씨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다음날까지 계속해서 영양주사를 맞으며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에 다른 가족처럼 여행이나 소소한 외출은 정말 꿈 같은 일”이라고 전했다.
근본 치료제 건보적용, 현실과 안 맞아
이런 열악한 치료 환경에서 지난 8월 국내 처음 소개된 단장증후군 치료제(가텍스주)는 장내 점막 성장을 촉진하고 흡수력을 높여 환자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고 있다. 2012년부터 미국과 캐나다 유럽 등에서 출시돼 TPN의 용량과 기간 감소 효과를 가져왔고 일부 환자에게는 영양주사를 완전히 끊는 수준까지 개선됐다. 연명수단에 불과한 TPN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현행 건강보험 산정특례 제도로는 대다수 국내 단장증후군 환자들이 싼값에 새 치료제를 접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단장증후군은 지난해 6월 희귀질환 산정특례 대상(본인부담률 10%)으로 지정됐지만 적용 기준이 ‘만 1세 이하 나이에 진단받은 선천성인 경우’로 한정해 수혜자가 극소수에 불과하다. 단장증후군 환자의 대부분은 선천성 보다 후천성 원인에 의해 발생하고 있는 현실과 동떨어진다. 산정특례 혜택을 못 받을 경우 한달 약값은 2500만원(1바이알 82만원), 1년 기준 약 3억원에 달한다.
이상훈 교수는 “단장증후군은 사회적으로나 의학적으로 소외돼 있어 치료 접근성이 매우 낮은 만큼, 환자들에게 대한 제도적 뒷받침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