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붉은색(홍룡포)이 아닌 황색(황룡포)을 입고 있네!” “그럼, 황제잖아.”
지난 20일 오후 서울 중구 덕수궁 내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중년 여성들이 고종의 어진을 살펴보며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대한제국의 미술-빛의 길을 꿈꾸다’전(이하 대한제국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은 평일인데도 관람객으로 북적였다.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효과로 일제강점기 그늘에 가렸던 고종 시대가 주목받는 가운데, 관련 전시와 공연이 잇달아 열려 관심이 쏠린다.
국립현대미술관의 대한제국전이 가장 눈길을 끈다. 개항이 가져온 활력, 제국 선포가 주는 위엄, 근대 문물의 유입이 회화와 사진, 공예품 등 미술이라는 범주 속에 어떻게 반영됐는지를 살펴보는 전시다. 고종이 아관파천에서 돌아와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거처했던 덕수궁에서 열려 더 의미 있다.
제국 선포 이후 궁중 의장물은 모두 황제의 지위에 맞게 격상됐다. 왕이 입는 홍색 대신에 중국 황제에게만 허용되던 황금색의 황룡포를 입었다. 채용신이 그린 고종 어진은 어좌의 용장식과 황룡포의 흉배 등에 따로 금박을 입혀 화려하기 그지없다. 옷의 주름은 서양식 입체감이 가미돼 종전의 어진과는 확연히 차이 난다. 드라마에서 고종이 미군 장교 유진초이에게 선사한 태극기의 모델이 된 ‘박영효 태극기’도 볼 수 있다. 1901년 고종의 50세 생신을 기념하기 위해 황태자가 마련한 잔치 장면을 그린 기록화는 이전 궁중의궤도에서는 볼 수 없는 원근법과 함께 궁궐을 지키는 신식 군인도 등장한다.
청나라 해상화파의 영향을 받아 장식용 병풍도 감각적이고 화려해진다. 장수와 행복을 비는 ‘해학반도도’, 출세와 장수의 상징 ‘곽분양행락도’에서 그런 영향을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1880년대 황철에 의해 최초로 사진관이 설립된 이래 사진은 이 시기에 정착한 근대 문물이다. 천연당사진관을 차렸던 서화가 겸 사진사 김규진이 고종을 찍은 ‘대한황제 초상사진’도 미국 뉴어크미술관에서 빌려와 최초 공개됐다. ‘곽분양행락도’ 등 외국에서 빌려와 처음 보는 것이 적지 않다. 전시를 기획한 배원정 학예사는 “13년간 존속했던 대한제국은 근대의 격동과 몰락의 황혼이 겹친다. 지금까진 후자에 방점이 찍혔지만 새로운 관점으로 외부 문물을 적극 수용하던 시대적 역동성을 작품을 통해 느껴볼 만하다”고 말했다. ‘미스터 션샤인’에서 고종으로 분했던 배우 이승준이 특별 홍보대사를 맡아 가이드 투어를 한다. 전시는 내년 2월 6일까지.
회화와 사진으로 조명했던 대한제국의 실제 황실 복식이 궁금하다면 바로 옆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 역사관 1층 전시실로 발길을 옮기면 된다. 문화재청에서 대한제국 황제 복식 특별전을 하고 있다. 고종의 생애 흐름에 따라 조선의 왕이 입었던 홍룡포와 대한제국 성립 이후 만들어진 황제 복식, 퇴위 이후 만들어진 태황제 예복, 근현대 복식 등 총 16종이 나왔다. 12월 12일까지. 서울 강남구 삼성로 경운박물관에서도 기획전 ‘오색·미려·기품’전을 통해 내년 2월 28일까지 고종황제의 복식을 선보인다.
김규진의 ‘대한황제 초상사진’을 모티브로 한 연극도 때마침 상연 중이다.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하는 ‘어둠상자’(사진기의 옛 이름)가 그것이다. 서양인에 의해 애처로운 모습으로 해석되는 자신의 초상 사진을 없애라는 고종의 밀명을 받드는 황실 사진가 집안의 분투기를 통해 고종을 새로운 각도로 조명한다. 12월 2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