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대법원이 성폭력 관련 사건을 심리할 때 가급적 피해자가 처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고, 피해자의 2차 피해 가능성을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한 이후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하는 판결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성인지 감수성은 성별 간 불균형 상황을 인식해 그 안에서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해내는 민감성을 뜻한다. 미투(#MeToo) 운동의 목소리가 법원에 조금씩 반영되기 시작한 모습이다.
27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판결 이후 지난 21일 현재 성인지 감수성을 언급한 판결문은 18건으로 확인됐다. 법원은 성폭력이 직접적으로 문제가 되는 형사 사건뿐만 아니라 민사와 행정 사건에서도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했다.
법조계에선 성인지 감수성을 강조하는 게 최근 판결의 경향이 되어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한변협 수석대변인 출신 노영희 변호사는 “의미 있는 경향이 되고 있다”며 “앞으로 성폭력 관련 사건에서 법원이 주요한 판단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피해자 진술 외에 물증을 찾기 힘든 성폭력 관련 사건에서 이 같은 경향은 재판의 결론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최근 창원지법 진주지원 형사1단독 심재현 부장판사는 ‘B씨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취지로 허위 고소한 혐의(무고)로 기소된 여성 A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심 부장판사는 판결에서 대법원 판결을 언급하며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하고 피해자가 2차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피해자가 처해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채 피해자 진술의 증명력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논리와 형평에 따른 증거판단이라 볼 수 없다”며 “고소 사실이 허위인지 여부는 처해 있는 특별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조현욱 한국여성변호사회장은 “피해자가 처한 사정에 중점을 두고 사건을 면밀히 보라는 취지”라고 말했다.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할 때 ‘피해자다움’을 근거로 삼았던 방식에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법원이 피해자다움을 강조하는 것은 앞으로도 지양해야 한다”고 말했다. 판사 출신 이현곤 변호사도 “피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법원이 경청한다 생각하고 진술할 수 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면서 “다만 법원이 더 구체적으로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기준을 제시해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피해자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볼 필요성이 커지는 만큼 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무죄추정원칙을 어떻게 지키면서 가해 혐의자의 항변을 들을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노 변호사는 “성인지 감수성을 고려하고 2차 피해를 방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지만 가해 혐의자가 누명을 쓰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며 “무죄추정원칙을 쉽게 간과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오는 29일 시작되는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항소심 재판에도 관심이 모아진다. 안 전 지사는 수행비서를 성폭행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져 1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1심 재판부는 안 전 지사에게 위력이 존재하지만 행사했다고 보기 어렵고 피해자의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봤다. 항소심에서도 안 전 지사가 업무상 위력을 행사했는지, 피해자 진술을 믿을 수 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될 전망이다.
안대용 기자 dand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