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초 유럽 사무직 확대, ‘화이트칼라 팩토리’ 등장
1950∼60년대 칸막이 없애고 상사·평사원 넓은 공간 공유, ‘오피스 랜드스케이프’ 구조로
이동통신기술 발달 90년대엔 재택근무 등 ‘모바일 오피스’
회사에 있다 보면 숨이 막힐 정도로 갑갑할 때가 있다. 제대로 된 칸막이 없이 사방이 탁 트여 누구에게나 뒤통수가 노출된 환경은 불안하기까지 하다. 다른 이들의 잡담 소리는 일에 집중해야 할 순간일수록 귓전을 부산하게 맴돈다. 이런 공간에선 업무와 관련해 할 말이 있어도 선뜻 입이 열리지 않는다. 개방된 사무실일수록 직원들은 조심스럽다. 바로 옆 동료와도 밀담을 주고받듯 모바일 메신저로 얘기하고, 정보요원도 아닌데 컴퓨터 모니터에 보안필름을 붙인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싶지만 군소리가 싫어 그렇게까지는 하지 못한다.
자리에 앉아 있기가 힘들 때는 잠시 사무실을 나오지만 그렇다고 오아시스가 있는 건 아니다. 내무반을 벗어나도 군부대 안인 것처럼. 작은 휴게실은 이미 다른 직원들이 차지했거나 상사들이 수시로 들락거린다. 조용히 혼자 있을 곳을 찾는 직원들은 유목민처럼 떠돌며 회사 복도나 로비에서 마주친다. ‘당신도 쉴 곳을 찾아 헤매고 있군요. 아 김 부장님, 박 부장님도…. 누구나 쉴 곳은 필요하군요.’ 유동인구가 적으면서 소파가 놓인 어느 층 로비, 입주업체가 나가 비어 있는 사무실, 이중문을 열고 나가야 하는 비상통로 계단 같은 곳에서 미생들은 간신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슬프지만 주차장이나 화장실도 틈새쉼터다. 대기업 회사원 이모(30)씨는 “회사 안엔 마음 편히 쉴 만한 공간이 거의 없다. 혼자 있고 싶을 땐 화장실에 들어가 한참을 있기도 한다”고 말했다.
‘사무직 공장’에서 ‘모바일 오피스’까지
바리스타가 커피를 내려주는 카페부터 당구대·탁구대 같은 레저시설, 신간으로 가득한 도서관, 맨발로 앉거나 드러누워 창밖을 내다볼 수 있는 휴게실, 전문 안마사가 상주하는 마사지실…. 이런 공간을 갖춘 회사들이 있다. 직장인 대부분에게 아직 부럽기만 한 ‘남의 회사’ 이야기다. 어느 회사나 사무실 진화 속도는 직원들 기대를 따라가지 못한다. 적잖은 돈을 들여 물리적 공간을 뜯어고쳐야 하는 만큼 저항이 만만찮다. 경영진은 아마 “그게 꼭 필요해?”라고 물을 것이다. 요즘 사무실은 직원 친화적으로 꾸미는 것이 유행이지만 초기 사무실의 변화는 산업·기술 발전에 맞춰 이뤄졌다.
흔히 생각하는 사무실의 일반적 형태는 20세기 초반 유럽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대량생산과 기업 합병이 활발해지면서 대기업이 등장하고 사무직 영역이 확대된 시기다. 그 전까지 교육받은 소수 남성이 맡던 사무직 업무는 공장 노동처럼 일반적이고 반복적인 작업으로 변해갔다. 그러면서 여성 종사자도 늘었다. 과거 작은 주거용 건물이었던 오피스빌딩은 넓은 개방형 공간에 요란한 사무기기로 가득 찬 형태로 변했다. 그 모습이 공장과 닮았다고 화이트칼라 팩토리(White-Collar Factories·사무직 공장)라는 별명을 얻었다. 화이트칼라 팩토리는 1950, 60년대를 거치며 체계적 형태를 갖춘다. 대표적 구조가 서독에서 등장한 오피스 랜드스케이프(Office Landscape)다. 칸막이 없는 넓은 공간에 평사원과 상사의 책상을 함께 배치하고 환풍기 등 공조기기와 조명을 천장에 설치하는 방식이다.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가능케 하고 공간 활용 효율성이 높다는 점에서 호평을 받았다.
사무실 설계는 1970년대 들어 다양성을 띤다. 오피스 랜드스케이프에서 직원들은 일률적 온도 조절과 건조한 공기, 소음 등 공유 공간의 불편함을 호소했다. 사방이 벽으로 이뤄져 외부와 단절되고 자연광이 들지 않는 환경도 개선사항으로 거론됐다. 이때 등장한 사무실 형태가 셀룰러 오피스(Cellular Office)다. 이 오피스에서는 모든 근무자가 창문이 있는 개별 업무공간을 갖고 각자 온도와 습도 등을 조절할 수 있다.
2000년대 창의성 중요…직원 정서 고려한 설계 늘어
분당 NHN 사옥 기획 단계부터 직원 편의 위주 디자인
“업무공간은 프라이버시 보장…공유공간은 안락해야”
1980년대에는 컴퓨터 보급과 맞물려 오피스 자동화가 이뤄진다. ‘인텔리전트 빌딩’ ‘스마트빌딩’ 개념이 이 시기에 나왔다. 1983년 세워진 미국 코네티컷주 시티플레이스빌딩이 첫 사례로 꼽힌다. 인텔리전트 빌딩은 사무 작업은 물론 보안 및 시설 유지·관리가 컴퓨터를 기반으로 자동화된 건물이다.
사무 자동화는 사무공간의 비인간화에 대한 문제의식과 함께 사용자 만족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요인으로 작용한다. 대안으로 제시된 ‘스몰시티 플랜(Small City Plan)’ 개념은 오피스를 하나의 작은 도시로 보고 프라이버시, 자연광 확보, 외부 조망 등에 주의를 기울인다. 1990년대는 앞서 받아들인 정보기술을 통해 사무공간의 가상화가 이뤄진 시기다. 이동통신기술 활용으로 직원들이 일하는 장소의 제약에서 자유로워지면서 모바일 오피스(Mobile Office)가 등장한다. 재택근무를 비롯해 특정 공간을 필요할 때만 사무실로 쓰는 호텔링·터치타운 시스템이 확산된다. 부동산 비용 상승도 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일만 하는 곳’에서 ‘놀며 일하는 곳’으로
사무실에 대한 인식은 기술 첨단화가 빨라진 2000년대 들어 IT 업계를 중심으로 또 한 차례 새로워진다. 기업 경쟁력으로 창의성이 중요해지면서 직원들의 정서적·정신적 면을 지원하는 공간 설계를 고민하게 된 것이다. 홍익대 디자인콘텐츠대학원 박순철씨는 석사학위 논문에서 최근 사무공간이 생산·관리 중심 공간에서 사람 간 소통과 환경 중심이 되는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무 처리는 조직과 장소를 중시하는 수직적 방식에서 구성원과 업무 효율에 초점을 맞추는 수평적 방식으로 변하고 있다. 변화에 부응하는 기업들은 구성원들의 안정과 창의력 발산을 지원하기 위해 각종 편의·휴식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공간을 재밌게 표현해 직원들의 정서와 창의성을 자극하는 사례들을 보자. 미국 에머리빌의 픽사는 개인 공간을 헛간처럼 친근하고 아늑한 분위기로 꾸몄고, 영국 런던 레드불은 층간 이동을 위해 계단 대신 실내에 미끄럼틀을 설치했다. 흥미 유발 공간 사례는 스위스 취리히의 구글 사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구글은 휴게공간뿐만 아니라 개인 업무공간과 회의실까지 모든 공간이 하나의 놀이터인 것처럼 설계해 업무와 놀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설계했다. 국내에서는 경기도 성남 분당 NHN 사옥이 ‘그린 팩토리’라는 개념으로 기획부터 설계까지 직원 편의를 위한 휴식·복지 공간을 디자인한 사례로 꼽힌다. 이들 기업은 유연한 사고를 위해 사무실에 노랑, 빨강, 파랑 등 원색을 쓰고 직선 대신 곡선을 적용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KBP웨스트는 의자 대신 상자를 임의로 쌓아 의자로 활용한다. 취리히 구글은 사내 레스토랑에 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공용 공간에는 당구대, 테이블풋볼, 비디오게임 등 놀이 요소를 도입했다. 업무 공간에는 달걀, 곤돌라, 욕조 등의 형태를 적용했다.
최근 사무실 디자인에서는 직원들이 자유롭게 업무공간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직원 개인과 팀의 필요에 따라 업무공간을 변형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덴마크 코페하겐의 플러그 앤드 플레이는 개인 책상이 달린 사각 깡통 모양의 이동식 상자를 곳곳에 배치했다. 상자는 회의공간에 옮기면 업무공간이 되고, 업무공간에 두면 휴식공간이 되는 식이다. KBP웨스트는 4개 회의실이 각각 출입구를 갖되 무빙도어를 이용해 하나의 큰 회의공간이 될 수도 있도록 설계했다. 프랑스 파리의 AD비스트는 재활용품으로 만든 가구와 미팅박스를 들였다. 이들은 가벼워 쉽게 옮길 수 있고 필요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변형할 수 있다. 미팅박스는 독립된 업무공간이나 회의공간이 되기도 하고, 미팅공간이나 휴식공간이 되기도 한다. 중국 베이징의 한 업체는 사내에 인력거를 배치해 이동식 휴게공간이나 업무공간으로 쓸 수 있도록 하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공유 공간을 개방적이고 안락하게 꾸미되 개별 업무공간은 자율성과 프라이버시를 보장하는 방식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일본 도쿄의 TBWA 하쿠호도는 사무실에 인공잔디와 나무 등을 배치해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조성했다. 사무실 중심인 중앙 복도에서는 만찬을 갖거나 패션쇼, 브랜드 론칭 행사 등 비공식 행사를 연다. 중앙 복도의 넓은 계단은 직원들이 자유롭게 앉아 대화하거나 다양한 규모의 미팅이 가능하도록 했다. 덴마크 빌룬드의 레고 사옥은 회의실에 평범한 책상과 의자를 놓는 대신 잔디밭처럼 꾸미고 소파에 누울 수 있도록 했다. 대형 식물로 장식하고 하늘과 잔디 이미지를 적용하는 등 시각적 표현을 적극 활용한 사례다. 픽사는 애니메이터들에게 지붕 있는 작은 오두막을 제공한다. 독립적인 공간에 개폐가 가능하도록 해 프라이버시를 조절할 수 있게 했다.
전문가들은 사무실이 기분 전환과 동기 부여가 가능하면서 직원들의 자율성, 독립성을 보장할 수 있도록 설계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안한다. 한 오피스 디자인 전문가는 “다양한 자극을 주고 권태로워지기 쉬운 업무에 활력을 불어넣을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며 “개인 취향을 반영해 각자 업무공간에 정체성을 부여할 수 있도록 구성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강창욱 기자 kcw@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