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평 국회의사당 638호서 결정
예산 덜고 더하는 치열한 신경전, 野 감액·與 정부안 지키기 대결
“니가 뭔데” “몇년 생이야” 막말
김수민 “울고 불면서 예산 증액”, 자기 지역구 예산엔 약한 모습
470조원에 달하는 내년도 국회 예산안은 20평 남짓한 국회의사당 638호에서 결정된다. 이곳은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예산소위원회 회의실이다. 예산안을 총괄하는 기획재정부 차관과 소관 부처 차관 및 주요 간부가 참석한 가운데 예산소위 소속 의원들이 예산을 심의한다. 전체 예산 규모가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 사업별로 예산을 덜고 더하는 치열한 신경전이 펼쳐진다.
예산소위 회의록에는 이 20평 남짓한 공간에서 470조원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야당 의원들은 사업을 하나씩 뜯어보며 감액을 주장하고, 여당 의원들은 정부안을 지키기 위해 방어에 나선다. 고성과 막말이 오가며 회의가 수차례 중단되기도 한다. 눈물로 예산을 읍소하는 공무원들의 모습도 기록돼 있다.
喜(희): 가까스로 소위 구성, 출발은 기쁘게
국회가 정상화되면서 예산소위는 지난달 22일 힘겹게 첫발을 뗐다. 출발이 지난해보다 8일이나 늦었다. 시작부터 법정 기한(12월 2일)을 넘길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자 여야 의원들은 첫날부터 기한 내 심의를 마치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첫날 회의실을 찾아 “후방 지원을 철저히 하겠다. 배고프지 않게 하겠다”고 농담을 건넸고, 바른미래당 간사인 이혜훈 의원은 “저희는 먹을 것에 약합니다”라며 웃으며 화답했다. 민주당 간사인 조정식 의원은 기획재정부 출신 송언석 자유한국당 의원을 향해 “우리 송 의원님은 워낙 전문가”라며 치켜세웠다. 여야 의원들은 예산안이 담긴 두꺼운 책자를 넘겨보며 “옛날에 고시 공부하던 심정으로 임하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적어도 심의를 시작할 때까지는 분위기가 좋았다.
怒(로): 예산 심의 곳곳에서 대격돌, 막말
심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여야 의원들은 치열하게 공방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고성과 막말도 어김없이 나왔다.
야당 의원들이 가장 집요하게 문제를 제기한 것은 통일부 예산이었다. 통일부가 남북협력기금 중 일부 사업을 비공개로 편성하자 야당 의원들은 관련 정보 공개를 줄기차게 요구했다. 앞서 야당 의원들이 자료 제출을 요구했지만 통일부는 ‘비공개 사업’을 이유로 구체적인 내역을 공개하지 않았다.
포문은 한국당 간사인 장제원 의원이 열었다. 장 의원은 “통일부는 나의 어떠한 질문에도 답변을 안 했다. 심의를 하라는 얘기냐, 하지 말라는 얘기냐”며 천해성 차관을 몰아붙였다. 같은 당 이장우 의원도 “통일부의 자세가 이번 정권의 국회를 보는 자세와 똑같다”며 큰소리로 질타했다.
여당인 민주당 의원들은 “심야에 고성으로 의사당이 흔들릴 지경이다. 지금 취조하는 게 아닌데 왜 이렇게 고성을 지르며 범인 취급을 하느냐”(박홍근), “비공개 예산인데 (내역을 공개하라고) 윽박지르는 게 어디 있느냐(조정식)”며 야당의 공세에 맞섰다.
끝내 분이 안 풀린 장 의원은 천 차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예산 설명하러) 내 방에 다녀갔어요? 국민과 소통한다고? 나는 국민이 아니냐”고 소리쳤다. 그러면서 “(통일부가) 혼나고 박살나서 가야 된다”고 경고했다.
마치 초등학생들의 싸움을 보는 듯한 장면도 있었다. 22일 공정거래위원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 장 의원과 조응천 민주당 의원은 서로 “그건 내 마음이다. 의견 제시까지 막지 마라”(장), “저도 제 마음이다. 제 의견 말하는 것”(조)이라며 언성을 높였다. 장 의원과 조 의원은 다음 날인 23일에도 소위 운영 방식을 두고 대립하다 결국 “니가 뭔데?”(장), “니가? 넌 몇 년생이야? 난 조가야”(조)라고 막말을 주고받았다.
哀(애): 예산 사수 위해 눈물까지
예산을 지키기 위해 눈물을 글썽이는 일도 생긴다. 지난달 25일 여성가족부의 한부모가정 복지시설 지원 예산을 심의할 때의 일이다. 송언석 한국당 의원이 “모든 것을 국가가 책임지는 것은 곤란하다”며 감액 의견을 내자 김용진 기재부 2차관이 “미혼모 시설을 방문했더니 공통적인 현상이 한부모가정 시설에 있던 아이가 나중에 보육원에 가게 된다”면서 울먹이며 증액 배경을 설명했다.
하지만 김 차관의 호소도 잠시. 여야 의원들이 다시 ‘비정하다’는 발언을 가지고 공방을 벌였다. 박찬대 민주당 의원이 “가장 취약하고 어려운 곳에 예산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예산을 삭감해야 한다는 것은 비정해 보인다”고 말하자 송 의원은 “말을 어찌 그렇게 하느냐”며 “비정하다는 말을 취소해 달라”고 반발했다.
현역 의원도 예산을 사수하기 위해서라면 눈물을 보이는 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예산소위에 앞서 진행된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예산 심의 과정에서 김수민 바른미래당 의원은 김재원 한국당 의원과 논쟁을 벌이다 사과까지 한 뒤 자신의 고향인 충북 청주 지역 예산을 지켜냈다. 논쟁 과정에서 김 의원은 잠깐 눈물을 보였는데, 이를 두고 김 의원은 “울고불고 싸우면서도 기어코 청주의 주요 예산을 증액시켰다”고 홍보했다. 비례대표 의원인 김 의원은 청주지역 출마를 고려하고 있다.
樂(락): 틈틈이 지역구 예산 챙기기
각종 예산의 증액과 감액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기 때문에 예산소위는 ‘예산심의의 꽃’으로 불린다. 동시에 각종 민원성 지역 예산이 증액되는 이른바 ‘쪽지 예산’의 주요 창구로도 활용된다. 계속 ‘감액’을 외치던 야당 의원들도 자신의 지역구 예산 앞에서는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다.
지난달 24일 국방부의 군공항 이전 사업을 위한 주민투표 예산 심의 과정. 소관 상임위인 국방위는 배정된 예산 15억원 가운데 2억6000만원을 감액했다. 전액을 삭감하라는 여야 의원들의 의견도 있었다.
심의 과정에서 대구가 지역구인 곽상도 한국당 의원이 이례적으로 감액에 제동을 걸었다. 곽 의원이 “주민투표 예산을 다 삭감하면 되겠느냐. 대구 관련 예산도 삭감이냐”고 묻자 서주석 국방부 차관은 “다 삭감하면 대구도 안 된다. 대구에서 주민투표할 경우 예산적 기반이 없어지게 된다”고 답했다. 그러자 곽 의원은 뻘쭘해진 표정으로 “저희는 삭감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여야 가리지 않고 의원들 사이에서 웃음이 나왔다. 한 동료 의원은 곽 의원의 반응을 보며 “재밌다”고 말했다. 대구공항 이전은 지역의 주요 현안이다.
김판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