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산책] 빙하를 닮은 유리조각

로니 혼, ‘무제’, Solid cast glass with as-cast surfaces. Roni Horn, Hauser&Wirth


누구에게나 ‘떠남’은 인생에 전기가 되곤 하지만 작가에게는 특히 그렇다. 뉴욕에서 태어나 미국의 예술 명문대학인 로드아일랜드 디자인스쿨(RISD)을 우등으로 졸업한 로니 혼(1955∼)이 그런 예다. 로니 혼은 대학 졸업을 하자마자 아이슬란드로 떠났다. 문명의 더께가 덜 입혀진 광활한 대자연과 맞닥뜨리고 싶었던 것. 빙하와 호수를 좋아했기에 모터사이클로 아이슬란드 곳곳을 홀로 여행했다. 젊은 날의 이 ‘떠남’은 그의 작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물과 얼음, 대지와 날씨에 주목하게 됐고 이후 인간의 인지력을 되묻는 작업을 하게 된 작가는 뉴욕과 레이캬비크를 오가며 활동 중이다.

로니 혼은 간결한 유리조각으로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드로잉, 사진 작업도 의미심장하지만 매끈한 얼음덩어리 같은 유리조각은 그를 스타덤에 오르게 했다. 푸른색과 하얀색 원통형의 유리조각은 멀리서 보면 차가운 물이 찰랑거리는 얼음 같다. 매끄러운 표면 위로 유리창살과 바깥 풍경이 또렷이 투영돼 있다. 안을 들여다보면 그 끝없는 투명함이 태고(太古)로 빨려 들어갈 듯하다. 손끝으로 살짝 만져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정말로 쨍하게 차가울까, 잠시 후면 녹아내리는 얼음덩이일까. 그러나 손을 대보면 차갑기보다는 보통의 온도가, 찰랑거림은커녕 돌처럼 단단함이 감지된다. 실제 무게도 1t이 훌쩍 넘는다.

로니 혼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유리 작업을 통해 날카로운 인식론적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빛과 주변 풍경을 부드럽게 품으면서, 극지방 어딘가에서 흘러내려온 빙하 더미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은 대자연과 바다를 우리 앞에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청명한 아이슬란드를 이처럼 미니멀하면서도 명징하게 표출할 수 있다니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영란 미술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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