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은(22)이 고심 끝에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무대에 서기로 했다. 가족의 생계를 위해 티칭 프로를 꿈꿨던 소녀가 차츰 실력을 쌓아 국내 무대를 평정하고 마침내 세계 무대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이다. 데뷔 첫해 활약으로 신인왕을 거머쥘 경우 한국은 5년 연속 LPGA 신인상을 배출하는 진기록도 세우게 된다.
이정은의 매니지먼트사 크라우닝은 28일 “올해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상금왕, 최저타수상 2관왕을 차지한 이정은이 내년 시즌 LPGA 투어 진출을 공식 선언했다”고 밝혔다. 이어 “이번 결정에 따라 이정은은 미국 진출을 위한 숙소, 캐디, 훈련환경, 투어 스케줄 점검 등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간다”고 덧붙였다.
이로써 초등학교 2학년 때 처음 골프를 접한 이정은은 골프 시작 15년 만에 LPGA에서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겨루게 됐다. 이정은은 다른 정상급 선수에 비해 골프를 늦게 시작하진 않았으나 공백기를 가지는 등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트럭기사인 아버지가 자신이 4살 때 추락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마음 놓고 골프에 집중할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해 초등학교 5학년 때 그만둔 후 중학교 3학년 때 다시 골프채를 잡았다. 다시 골프채를 잡은 것도 ‘골프를 잘 해 티칭 프로를 하면 먹고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절박함으로 다시 골프채를 잡은 이정은은 점차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전국대회인 베어크리크 아마추어골프대회에서 첫 우승하며 자신감도 붙었다. 국가대표로도 선발돼 2015년 광주유니버시아드에서 여자골프 개인전 및 단체전 2관왕에 올랐다. 같은 해 프로로 전향해 KLPGA 투어에 돌입했다.
이정은은 흔히 말하는 ‘골프 천재’는 아니었지만 가족에 대한 책임감과 남다른 훈련량으로 실력을 쌓아왔다. KLPGA 2·3부 리그에서도 뛰며 자신을 담금질했다. 남다른 정신력을 갖고 있다는 평가 역시 이러한 과정이 밑바탕이 됐다. 2016 시즌 KLPGA 퀄리파잉스쿨 통과 시에는 30등이었지만 그해 신인상을 타는 등 실력이 업그레이드됐다. 이후엔 상복도 터졌다. 지난해 4월 롯데렌터카 여자오픈 우승을 시작으로 한 시즌 4번이나 우승컵을 들어 올리며 무관의 한을 풀었다. 또 KLPGA 대상, 상금왕, 다승왕, 평균타수상, 인기상, 베스트플레이어상까지 6관왕을 휩쓴 최초의 선수로 이름을 올렸다. 올해도 시즌 2승, 상금왕과 평균타수상 2연패를 달성했다.
국내 1인자로 올라선 이정은에게 LPGA 진출은 정해진 수순이나 마찬가지였다. 지난해 KLPGA 상금왕 자격으로 출전한 US여자오픈 등 LPGA 메이저대회, 롯데 챔피언십, KEB하나은행챔피언십을 통해 LPGA 무대도 경험했다. 이달 초 퀄리파잉(Q) 시리즈에선 전체 1위로 통과했다. 8라운드 동안 단 한 차례도 오버파를 기록하지 않았다. 성적만 놓고 보면 LPGA 진출을 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지만 휠체어를 타야 하는 아버지를 비롯한 가족과 떨어져야 하는 상황 등으로 LPGA 진출을 고민해왔다. 크라우닝은 “이번 결정은 부모의 전폭적인 지지와 메인 스폰서인 대방건설의 적극적인 지원 의사가 결심을 굳히는 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정은이 LPGA 진출 결심을 굳히면서 5년 연속 LPGA 5년 연속 한국인 신인상 탄생 기대감도 높아지게 됐다. 한국 선수들은 1998년 박세리를 시작으로 올해 고진영(23)까지 모두 12차례 신인상을 받았다. 이정은은 크라우닝을 통해 “내년 시즌은 미국 무대에 안정적으로 적응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겠다”며 “성적이나 타이틀 욕심을 버리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 투어 활동을 하겠다”고 각오를 밝혔다.
김현길 기자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