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근로정신대 피해자 김성주(89) 할머니는 29일 “지금도 1944년 5월 31일을 분명히 기억한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전남 순천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한 직후 ‘일본에 가면 상급학교에서 마음껏 공부할 수 있다’는 일본인 담임교사의 말을 듣고 나고야행 배에 오른 날이었다.
그곳에서 그를 기다리던 건 학교가 아닌 공장이었다. 당시 15살 소녀는 연필이 아니라 절단기를 든 채 금속판을 자르며 혹사당했다. 사고로 왼쪽 손가락까지 잃었으나 옆에 있던 일본인들은 그 손가락을 들고 공처럼 갖고 놀았다고 했다. 김 할머니는 “할머니가 못 가게 했는데 내가 왜 일본까지 와서 이렇게 고통을 받느냐고 통곡했다”며 울분을 토했다.
고국에 온 뒤에도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김 할머니는 “남편에게 ‘위안부’ 소리를 들으며 맞았고 지금도 고향에 가면 손가락질을 당한다”며 “그런 고통을 받고 세상을 살아왔다”고 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 막바지였던 1944년 5월 전시상황에서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기 위해 전남과 충남 일대에서 10대 소녀 300여명을 데려갔다. 이들은 주로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에 배치됐다. 김 할머니 역시 이때 일본으로 갔다. 그는 그해 12월 7일 일어난 ‘도난카이’ 대지진으로 발목을 다쳐 지금까지 거동이 불편하다. 여동생 정주(87) 할머니도 전범기업 ‘후지코시’에 강제 동원돼 서울고등법원에서 소송을 진행 중이다.
김 할머니는 서울변호사회관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일본 정부와 미쓰비시중공업은) 근로정신대에 갔다 온 사람들에게 사죄하고 보상하기를 바란다”고 호소했다. 다른 원고 4명은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 중이거나 거동이 불편해 참석하지 못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