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1100주년, 고려를 돌아보다] 강대국 틈새 실리 외교… 外人 파격 등용 ‘글로벌 코리아’ 원조

한국 역사학자협의회 관계자들이 2015년 10월 북한 개성에 있는 태조 왕건릉을 찾아 왕건의 어진(초상)을 관람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당시 왕건릉을 찾은 우리 측 학자들을 상대로 왕건릉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북한의 해설사. 사진공동취재단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 북한 문화재 특별전에 출품됐던 북한의 국보인 태조 왕건상. 국민일보DB
 
이익주 서울시립대 교수


지금으로부터 1100년 전 한반도에 새로운 국가 고려가 들어섰다. 고려는 외세의 침략에 유연하게 대응하면서 474년간 왕조를 유지하며 역동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다양한 분야에서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겼다. 하지만 이 시기는 우리에게 역사의 사각지대로 남아 있다. 한민족의 시작을 알 수 있는 고대사나 근현대사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조선사에 비해 관심이 덜했던 게 사실이다. 고려사는 TV 드라마나 영화, 소설에서도 자주 다뤄지지 않는다. 국민일보는 고려 건국 1100주년을 맞아 고려의 정치 사회 문화를 두루 살피는 시리즈를 3회에 걸쳐 선보인다.

고려 왕조가 지속된 기간은 918년부터 조선이 건국된 1392년까지였다. 세계사에서 이 시기는 어떤 시대였던가. 모두가 알다시피 유럽은 중세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중세를 설명할 때 자주 따라붙는 수식어는 ‘암흑의 시대’라는 문구다. 사람들은 중세라고 하면 빈곤 역병 학살 같은 단어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최근 들어 서구 학계 안팎에선 중세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당대의 지성으로 통한 이탈리아 학자 움베르토 에코(1932~2016)만 하더라도 생전에 ‘중세’ 시리즈를 펴내며 이 시기를 찬양하는 글을 여럿 남겼다. 에코는 생전에 한 문학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중세는 암흑시대가 아니라 찬란하게 빛나는 시대였다”며 “그 시대의 비옥한 토양에서 르네상스가 출현했다. 활기찬 변화의 시대였다”고 말했다.

서양에서는 이렇듯 중세를 다시 보려는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비슷한 시기 한반도에 들어선 국가 고려에 대해서는 여전히 무관심한 편이다. 우리는 왜 고려에 대해 모르는 것일까. 고려가 500년 가까이 왕조를 유지한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최근 서울 동대문구 서울시립대를 찾아가 이 학교 이익주(56) 국사학과 교수를 만났다. 서울대를 나와 동대학원에서 고려사를 전공해 박사학위를 받은 이 교수는 국내 역사학자들의 최대 연구 모임인 한국역사연구회에서 회장을 맡고 있다.

-사람들은 고려사에 대해 잘 모른다. 이유가 뭘까.

“한국의 근대역사학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살펴보자. 해방 이후 역사학계의 가장 큰 목표는 식민사학을 극복하는 거였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식민사학은 한국의 역사를 ‘열등한 역사’로 만드는 게 목표였는데 그때 타깃이 됐던 게 고대사와 조선사였다. 고대사와 조선사가 많이 왜곡돼 있었고, 학자들은 자연스럽게 이들 두 시대에 집중했다. 고려사는 상대적으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대중매체나 문학의 영역에서 고려사는 자주 다뤄지지 않았다. 이런 이유들이 포개지면서 고려사는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공백’으로 남게 됐다.”

-우리는 왜 고려사를 알아야 하는가.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건 ‘단절’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고대사와 조선사만 알면 역사의 흐름을 파악할 수 없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뭔가. 역사의 발전 과정을 되짚어보면서 교훈을 얻자는 거다. 고려사를 모르면 역사 이해에 중대한 결함이 생긴다.”

-고려가 한국사에서 갖는 의미는 뭘까.

“논쟁이 필요한 부분인데 이런 시선도 있다. 한민족의 원형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물었을 때 그게 고려 때일 수도 있다. 우리는 신석기 시대에 한민족의 공동체가 만들어졌고, 그 공동체가 지금의 역사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민족이라는 건 역사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지는 측면이 있다. 한민족의 ‘원형’이 완성된 게 고려 때일 수도 있다는 거다.”

이 교수는 지난 7월 JTBC 강연 프로그램 ‘차이나는 클라스’에 출연해 강대국 사이에서 실리를 추구한 고려의 노련한 외교 전략을 치켜세웠다. 그는 “고려는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의 침략을 받으면서도 500년 가까이 버텼다”며 “조선에 비하면 고려는 ‘외교 천재’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고려사를 살피면 이 나라가 얼마나 능수능란한 외교술을 보여줬는지 확인하게 된다. 강동 6주를 얻은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유명한 10세기만 놓고 봐도 고려는 송나라와 거란족, 여진족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펼치며 적잖은 이문을 남겼다.

-고려를 ‘외교 천재’로 규정했는데.

“만약 지금의 대한민국이 우리 역사에서 어떤 나라를 벤치마킹해야 한다면 그게 바로 고려일 것이다. 왜냐면 고려 왕조가 유지되던 시기는 동아시아에 다원적인 국제질서가 존재한 때였다. 조선은 중국의 명나라나 동쪽의 일본 정도만 견제하면 됐지만 고려는 아니었다. 많은 강대국의 눈치를 보면서 생존 전략을 모색해야 했다.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에 둘러싸인 지금의 한반도 상황은 당시 고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고려의 외교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많은 사람들은 고려가 저자세 외교를 했다고 말한다. 실제로 고려는 ‘강대국의 외교’를 하지 않았다. 스스로 약소국이라는 걸 인정하면서 강대국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맞출 것인지 고민하는 ‘약소국의 외교’를 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공존의 틀을 만들어나갈지 고민했다.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 시기에 축적된 역사적 경험을 활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고려 왕조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비결을 외교의 힘으로만 설명할 순 없을 것이다. 내치(內治)에서도 고려는 독특한 면모를 보여준 국가였다. 예컨대 4대 왕이었던 광종의 경우 개혁정책의 물꼬를 텄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중국 후주(後周) 출신인 외국인 쌍기를 관료로 채용했는데, 쌍기는 고려 사회에 학술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역사서인 ‘고려사’에 따르면 고려시대에 관료가 된 중국계 귀화인은 40명 가까이 된다. 능력이 있는 외국인이라면 국적을 가리지 않고 등용했던 셈이다. 박종기 국민대 명예교수는 저서 ‘고려사의 재발견’에 “고려는 국제화 세계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한 왕조, 즉 ‘글로벌 코리아’의 원조가 되는 셈”이라고 적었다.

-고려 왕들의 정치력에 대해서는 어떻게 평가하나.

“고려가 유난히 정치를 잘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치를 소홀히 했다면 나라가 무너졌을 것이다. 고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는 왕건의 후삼국 통일이다. 통일 후유증이 심각할 수 있었을 텐데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걸 보면 고려 왕실의 정치력이 상당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다. 고려는 신라나 후백제 사람도 적극적으로 끌어안았다. 남북통일 시대를 염두에 둔다면 이런 부분도 허투루 넘겨선 안 될 것이다.”

-태조 왕건 외에 고려사에서 주목할 만한 왕이 있을까.

“공민왕을 꼽고 싶다. 고려는 몽골과 20년 넘게 전쟁을 했고 100년 가까이 원나라의 간섭을 받았다. 공민왕은 원나라의 뜻에 따라 왕에 오른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원으로부터 독립된 목소리를 내려고 반원운동을 펼쳤다. 왕위는 물론이고 자신의 목숨까지 위험할 수 있는데도 행동에 나섰다. 우리 역사에서 이런 왕은 거의 없었다.”

-고려 왕조가 계속 이어졌다면 좋았을까.

“고려가 망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14세기 들어서면서 성리학으로 정신무장을 한 개혁적인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라는 구(舊) 체제가 유지될 순 없는 노릇이었다. 고려는 외부의 힘으로 망한 게 아니라 내부의 힘이 성장하면서 깨져버린 나라였다. 역사적인 소임을 다한 뒤 망한 것이다. 더 유지될 수 없는 국가였다.”

-고려라는 나라를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자연스러운 나라였다. 조선은 이념을 앞세운 국가였지만 고려는 아니었다. 이념보다는 현실을 중요하게 생각했고 옳고 그름의 잣대로 모든 걸 재단하려 하지 않았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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