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뉴욕에 사는 최모(36·여)씨는 더 이상 페이스북을 사용하지 않는다. 가끔 소소한 일상의 글과 사진을 올렸으나 지난 9월 페이스북을 탈퇴했다. 최씨는 20대로 보이는 백인 남성으로부터 페이스북 친구 신청을 받았다. 모르는 사람이라 그의 계정에 들어가 프로필과 게시글을 살펴보고 깜짝 놀랐다. 히틀러의 사진과 나치를 상징하는 문양인 스와스티카, 나치 친위대 마크가 올라와 있었다. 인종 차별적 글도 많았다. 네오 나치가 틀림없어 보였다. 최씨는 이 남성이 자신을 지목해 친구 신청한 데 대해 섬뜩함을 느꼈다. 또 그가 자신을 해코지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최씨는 최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떨린다”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미국의 인종차별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그는 대선 후보 시절부터 멕시코 불법 이민자들을 겨냥해 범죄자, 강간범, 마약거래상이라는 막말을 퍼부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중남미계 이민자를 목표로 해서 시작된 이민자 공격이 아시아계를 포함한 모든 소수인종으로 확산될 징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 한인 이민자들의 피해 사례는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 1년 차였던 2017년 11월 뉴저지주 교민사회가 발칵 뒤집어지는 일이 발생했다. 명문인 버겐아카데미 고등학교에서 스페인어 교사가 수업 도중 “출신 국가를 말해보라”고 말했다. 한국계 학생 6명이 “한국에서 왔다”고 밝히자 한 명씩 일일이 가리키며 “나는 한국인을 싫어한다(I hate Koreans)”라며 인종차별적 발언을 한 것이다. 한국 교민단체가 힘을 합쳐 그 교사의 해임을 요구했고, 지역 정치권과 다른 소수인종도 동참했다. 결국 그 교사는 교단에서 퇴출당했다.
같은 해 7월에는 뉴욕 퀸스에 거주하는 이모(25·여)씨가 뉴욕 지하철 안에서 봉변을 당했다. 한 백인 남성이 이씨를 향해 “내 나라에서 당장 떠나라”고 인종차별 발언을 대놓고 한 것이다. 불안감을 느낀 이씨는 목적지도 아닌 다음 역에서 내리려고 했으나 이 남성도 따라 내리려고 해 하차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남성이 옆 칸을 통해 다시 승차했을 때 이씨는 극도의 공포감을 느꼈다. 이씨가 목적지에 내리자 이 남성은 뒤를 쫓아와 이씨 머리에 침을 뱉었다. 이씨가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밀치고 달아났다.
뉴욕 플러싱의 지하철역에서는 ‘한국인은 당장 떠나라(Koreans out now)’라는 낙서가 잇따라 발견돼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길거리나 대형마트 주차장 등에서 차를 탄 젊은 백인 남성들로부터 욕설과 인종차별적 고함소리를 들었다는 한인 피해 사례는 꾸준히 늘고 있다.
어른들의 잘못된 인식은 미국 아이들도 따라 배운다. 한 한인 학부모는 “트럼프 행정부 들어 한국인을 비롯한 소수인종 학생에 대한 왕따 피해가 급증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최영수 변호사는 1일 “한국인만 타깃으로 한 조직적인 공격은 없었지만 트럼프 대통령 등장 이후 한국 이민자들이 이민자 혐오 공격의 피해를 보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소수인종이 공격받는 사례가 전체적으로 증가하면서 한국인 피해도 덩달아 늘어나는 것”이라고 했다.
최 변호사는 “트럼프 대통령의 반이민 정책은 미국 내 소수인종에게는 전쟁과 다름없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부추기니 그동안 정체를 숨겨가며 활동하던 백인 우월주의자들과 네오 나치들이 대놓고 활개를 치고 있다. 반이민 문제가 인종차별 문제로 확산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 이민자들의 불안감은 크다.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의 악몽을 떠올리는 한인 이민자도 있었다. 2007년 4월 16일 한국 이민 1.5세대 조승희가 무차별 총기를 난사해 32명이 숨지고 29명이 부상을 당한 사건이다. 뉴욕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박모(52)씨는 “버지니아 공대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을 때 교민사회에서는 한국인들을 타깃으로 한 보복범죄가 발생하지 않을까 초긴장 상태로 지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박씨는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단언했다. 그는 “만약 현재 분위기에서 한국인이나 한국계가 그런 범죄를 저지른다면 한국 교민사회 전체가 백인 우월주의자나 네오 나치들의 표적이 될 수 있다”고 한숨을 쉬었다.
북·미 비핵화 협상 국면이나 한국 내 반미(反美) 움직임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이민자들도 많다. 버지니아주에서 자영업을 하는 한 교민은 “북한이 핵무기와 장거리미사일로 미국을 위협했을 때 한 미국인 손님이 남북을 싸잡아가며 ‘너희들은 왜 그러냐’는 공격적인 질문을 던진 적이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만약 북한이 핵실험을 재개하거나 다시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면 미국 내 한국 이민자들도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있다”고 걱정했다. 워싱턴DC 인근 메릴랜드주에 사는 김모(41)씨는 “주한 미국대사관 앞에서 기습시위가 벌어지는 등 한국에서 반미 움직임 소식이 전해질 때마다 불안하다”면서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반미운동을 악용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가장 큰 문제는 늘어나는 한인 이민자 피해에 손쓸 수 있는 방안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박동규 변호사는 “피해를 당했을 때 경찰에 신고하는 것 말고는 대처 방안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도 “버겐아카데미 사건은 한국 교민사회에 경종을 울렸다”면서 “그 아픔을 계기로 한인 시민사회단체들이 뭉치면 의미 있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말했다.
워싱턴DC의 주미대사관 관계자는 “한인이 피해를 입었다고 할지라도 미국 영토 내의 수사권은 미국 정부가 가지고 있다”면서 “대사관은 한인 피해자 보호와 신속한 수사 등을 미국 경찰에 요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워싱턴·뉴욕=하윤해 특파원 justi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