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급성골수성백혈병에 걸려 22살의 나이에 숨을 거둔 고 황유미씨의 아버지,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반올림)’ 대표 황상기씨는 6일 유미씨의 유골이 뿌려진 설악산 울산바위에 간다. 지난달 23일 삼성전자에서 사과를 받은 뒤 첫 방문이다. 황씨는 “유미가 술은 안 했으니, 음료수 몇 개 가져가 뿌려주면서 ‘아빠가 약속을 지켰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지난달 29일 서울 광진구 동서울종합버스터미널 2층 한 카페에서 만난 황씨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한결 편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황씨는 2007년 딸이 사망하기 전 “네 병이 산업재해라는 것을 꼭 밝히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11년 뒤에야 약속을 제대로 지킬 수 있었다.
황씨에게 동서울종합버스터미널 2층의 카페는 특별한 곳이었다. 딸이 세상을 떠나고 약 4개월이 지난 2007년 7월쯤, 황씨는 다산인권센터를 통해 이곳에서 현재 반올림 상임활동가로 지내는 이종란 노무사를 처음 만났다. 딸의 죽음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무시당하기 일쑤였던 그가 마지막으로 손을 뻗친 곳이자, 11년이라는 지난한 싸움의 첫 발을 뗀 곳이다. 황씨는 “11년 만에 여기에 온다”며 “그때는 억울함만 갖고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자리에 함께한 이 노무사는 “저희에겐 의미 있는 곳이라 아까 사진도 찍어뒀다”며 황씨를 향해 “그동안 고생 많으셨다”고 말했다.
유미씨가 백혈병 진단을 받은 지 13년, 사망한 지 11년이 지났지만 황씨는 과거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그는 “유미가 죽기 며칠 전이었어요. 자기도 안 된다는 걸 알았던 것 같아. 뭘 먹질 못하니까 혹시 뭐가 먹고 싶으면 바로 사먹으라고 유미 지갑에다 십몇만원 넣어뒀어요. 하루는 퇴근하고 집에 왔는데 유미 동생이 ‘누나가 나 이거 다 줬다’면서 보여주는 거야. 그때 가슴이 철렁했어. ‘너 사먹으라고 줬는데 왜 동생 다 줬어?’ 물으니까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더라고. 아무 표정 없이…”라고 말했다.
소회를 묻는 질문에 황씨는 “좀 괘씸하다는 생각도 든다”고 했다. 그는 “처음 산재를 요구할 때 회사는 ‘화학약품을 안 쓴다’고 거짓을 했다”며 “근데 지금은 반도체 공장에 유해인자에 의해 병이 걸린 분들한테 공장 관리를 소홀히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어. 그때 잘못 인정하고 사과해서 치료받게 해줬으면 노동자들도 병 덜 걸렸을 건데”라고 말했다.
황씨는 지금도 강원도 속초에서 택시운전사로 일한다. 유미씨가 투병 중일 때 직접 택시로 딸을 이동시켰다. 유미씨가 숨을 거둔 곳도 그의 택시 안이었다. 그는 “치료하러 다닐 적에 유미가 앉아 있을 힘이 없어서 택시 뒷자리를 침대처럼 만들었어요”라며 “한가할 적에 뒷자리를 돌아보면 문득 유미 생각이 나죠”라고 말했다.
글·사진=권중혁 기자 gree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