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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에서… 걷다 웃다 충전하다

샐러리맨 두 명이 덕수궁 안 ‘고종의 길’을 걷고 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이듬해인 1896년 고종이 일본군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해 이용했던 이 길은 ‘아관파천의 길’이라고도 불린다. 권현구 기자


점심시간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직장인들. 오른쪽 사진은 같은 시간 여의공원 산책로를 걷는 샐러리맨들. 윤성호 기자


드론으로 포착한 강남 도산공원 산책로와 덕수궁 돌담길. 아래쪽은 여의공원 산책로. 자전거 전용도로와 보행자 전용 산책로 표시가 선명하다. 윤성호 기자


사진=게티이미지


서울이 세계 최고 도시 가운데 하나로 꼽히기 시작한 건 한참 전의 일이다. 1000만명에 육박하는 인구, 강남북을 가로지르는 반경 1㎞ 이상의 한강, 마천루와 아파트들, 최첨단의 정보통신 환경…. 자랑할 만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빠지는 게 있다면 랜드마크 공원이다. 뉴욕의 센트럴파크, 런던의 하이드파크 같은 도심공원이 서울 중심가엔 없기 때문이다.

뉴욕 센트럴파크는 세계 경제수도인 이 도시의 핵심 기업들이 몰려 있는 맨해튼부터 퀸스, 브루클린, 스태튼아일랜드 등까지 이어진 녹색지대다. 산책하고 조깅·사이클링하는 시민들로 늘 활기찬 곳이다. 하이드파크는 런던 구도심과 신도심을 관통하는 장대한 공원이다. 공원 안 호수와 숲들을 거치며 런던 곳곳의 유서 깊은 유적들을 바라보고, 또 걸어 나가 둘러볼 수 있다. 두 공원이 샐러리맨의 휴식처인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아침 일찍 출근해 하루 종일 회사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에게 점심시간은 황금과도 같은 시간. 대한민국 직장인의 점심시간은 정오부터 오후 1시30분까지다. 업무에 따른 식사 약속이 있을 때도 있지만, 빠르게 식사를 마치면 남는 시간을 일로부터 멀찍이 떨어져 지낼 수 있는 시간이다. 그야말로 ‘패스타임’(pastime·시간을 내 편하게 즐기는 취미)인 셈이다.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일하는 샐러리맨의 패스타임 첫 번째 희망 목록은 산책이다. 푸른 숲 사이를 걸으며 최대한 산소를 호흡하고 체력을 보충하는 일은 생존경쟁에 가깝다.

그런데 서울엔 센트럴파크, 하이드파크만 한 규모의 녹색 도심공원은 없다. 그나마 여의공원이 한가운데 자리 잡은 여의도는 사정이 좋은 편이다. 나무숲 대신 빌딩숲 사이에서 우리 직장인들은 어떤 점심 패스타임을 보내고 있을까.

광화문 일대, 반짝이는 산책로들

출퇴근하는 서울 샐러리맨들이 가장 많은 곳이 바로 광화문·태평로·서울시청·을지로 일대다. 마천루와 오피스빌딩, 백화점, 상가들이 빼곡히 들어선 이 지역엔 한가로이 점심시간을 보낼 녹색지대가 없다. 모든 도로에는 버스와 승용차들이 가득하고, 골목마다 식당과 상가가 자리 잡고 있다.

이런 곳에도 산책 ‘핫플레이스’가 있다. 바로 덕수궁 주변이다. 예전 한때 덕수궁 돌담길은 연인들의 추억 쌓기 장소였다. 하지만 이곳의 현재 점령자는 직장인들이다. 평일 정오쯤부터 덕수궁 돌담길은 삼삼오오 걷는 샐러리맨으로 가득 찬다. 태평로 덕수궁 정문부터 이화여고, 정동교회 방면으로 난 좁은 도로 양옆으로는 슈트 차림에 운동화를 신은 이들이 꽤 빠른 걸음으로 산보하는 것이다.

직장인들이 넘쳐나자 문화재청 덕수궁관리소는 2016년 10월 ‘덕수궁 정오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입장료 1000원을 내면 석조전 등 다양한 볼거리를 감상하고, 작지 않은 숲을 거닐 수 있다. 최근엔 ‘고종의 길’도 걸을 수가 있다. 이 길은 구한말 고종이 일본군에게 쫓겨 러시아공사관(현 미국대사관저)으로 피신할 때 이용했다는 길이다. 그동안 미국대사관 측과 소유권 시비로 일반에 개방되지 못했다 최근 문화재청에 의해 복원돼 개방됐다. 문화재청이 잘못된 지도로 엉뚱하게 복원했다는 논란도 일긴 했지만 직장인들에게 이는 논외다. 덕수궁 주변 한 상인은 “요즘 조금 추워져서 인파가 줄었지만, 초가을만해도 점심시간에는 수천명이 이 길을 걷는다고 보면 된다”고 전했다.

덕수궁을 나와 프레스센터 쪽으로 올라가면 물이 흐르는 청계천 길이 열린다. 곧게 뻗어 중랑천까지 이어진 이 길을 따라 종로 을지로 동대문 주변 직장인들이 점심시간 밀집한다. 경복궁 동쪽에서 동숭동 방면 창경궁으로 이어진 길도 산책로다. 바로 옆 도로에 차량이 운집해 있지만 고궁과 플라타너스 가로수 사이를 걷는 일이 나쁘지 않다.

워킹(walking) 파워, 여의공원

‘금융 일번지’ 여의도에는 여의공원이 자리를 틀고 있다. 1990년대 후반 여의도광장 자리에 들어선 이 공원은 이제 나무와 잔디밭으로 가득한 녹색지대로 서울 도심공원의 모범이라 할 만하다. 여의도 동쪽편의 금융가 직장인들과 서쪽편의 국회·정당 등에서 일하는 직장인들이 점심시간대에 조우하는 곳이기도 하다. 걷기 및 조깅 전용보도, 자전거 전용도로 등을 갖춰 한껏 패스타임을 즐길 수 있다. 걷다 보면 차량을 마주쳐야 하고, 수많은 신호등을 건너야 하는 광화문 일대 직장인들보다 여의도 샐러리맨들은 쾌적한 환경을 가진 셈이다. 추운 겨울을 제외한 사시사철 점심시간에는 직장인 산책 행렬이 줄지어 걸어야 할 정도로 인파가 몰리는 곳이다. 점심시간을 지나서도 일하다 짬짬이 걷는 ‘워킹족’도 많다.

직장을 나서서 족히 5분만 걸으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 숲과 잔디밭, 걷다가 쉴 수 있는 벤치, 한 바퀴를 도는 데 3㎞에 가까운 코스…. 여의공원이 워킹파워를 빛내는 자랑거리들이다.

비좁은 산책로, 몸부림치는 강남 직장인들

강남 테헤란로 일대에는 수많은 기업이 몰려 있다. 강북에서 강남으로 사옥을 옮긴 대기업들과 IT 기업을 비롯한 각종 회사들이 있지만 집값, 땅값으론 대한민국 1등인 이곳이라서인지 딱히 도심공원이라 부를 만한 곳이 몇 군데 없다. 사정이 이러니 이곳 직장인들에게 점심시간 공원 산책은 사치와도 다름없다. 산책하려고 차를 타고 20분 이상 달려가서 걸어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테헤란로 주변에는 도심공원이 없기 때문이다.

일부러 도산공원이 있는 신사동, 학동공원 주변 식당으로 이동해 점심을 먹고 산책에 나서는 강남 샐러리맨들이 많다. 도산공원은 압구정동과 신사동, 학동이 만나는 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빌딩들로 가려져 맘먹고 찾아가지 않으면 찾기도 쉽지 않은 곳이다. 산책로는 600m 정도로 규모도 보잘것없다. 그래도 도산 안창호 선생 유적들을 볼 수 있고, 강남에선 보기 드문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자라는 곳이라 산책하기에 나쁘지 않다.

최근엔 아파트에 둘러싸인 학동공원에도 샐러리맨 워킹족들이 출몰한다. 산책로보다는 놀이터와 근린생활체육시설이 주로 설치된 곳이지만 책상물림에 지친 직장인들에겐 새로운 발견의 장소다.

양쪽으로 산책로와 자전거도로가 이어진 양재천 주변도 샐러리맨 워킹족들이 몰리는 곳이다. 기업이 밀집한 테헤란로에서 멀어 접근성이 떨어지지만 자가운전까지 해서 오는 직장인이 많다. 양재천 서쪽 방향을 걷다 보면 울창한 수목을 갖춘 양재시민공원까지 산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점심시간 오너드라이브 샐러리맨들이 몰리면서 이 일대에는 주차전쟁까지 벌어지기도 한다. 테헤란로 주변 기업에 다니는 한모(36)씨는 “점심 먹고 차를 몰아 양재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30분 정도 산책하는데 차가 너무 많이 몰려 주차장은 정오를 넘으면 아예 주차할 수 없을 정도로 만원”이라고 전했다.

신창호 기자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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