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신이 건네는 위무의 손길인가. 열흘 후에나 출간된다는 책은 예정보다 일찍 나왔다. 한국박물관회가 허동화(1926~2018·사진) 한국자수박물관장의 망백(望百)을 기념해 기획한 문집 ‘온 세상을 싸는 보자기’. 병실에서 책을 받아든 그는 암 투병의 고통도 잊은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책을 안아든 다음날 세상과 이별했다.
‘온 세상을 싸는 보자기’ 출간 기념 기자간담회가 5일 서울 광화문의 한 식당에서 열렸다. 지난 5월 24일 허 선생이 작고한 지 6개월여 만이다. 간담회를 주선한 민화 전문가 정병모 경주대 교수는 “허 선생은 시시하게 여겨 쓰고 버렸던 우리 자수와 보자기의 가치를 알아보고 이를 컬렉션해서 세계적 미술로 격상시킨 분”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부고조차 알리지 말라고 유언을 남겨 문화계가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다. 책을 통해 그의 업적이 세상에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문화예술계 지인들이 그를 기리며 쓴 글과 그림을 모은 문집은 총 7권으로 구성됐다. 참여자는 자수 및 보자기 장인, 사진작가, 학자, 시인, 출판인, 의사 등 다양하다.
1권 ‘규방 문화를 세계로’는 사라 오카 호놀룰루미술박물관 큐레이터 등 외국 박물관 관계자들이 쓴 글을 모았다. 2권 ‘작은 박물관의 큰 기적’은 국내 박물관 관계자들이 썼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한국자수박물관이 해외 전시를 50차례 이상 한 걸 두고 “어떻게 국립중앙박물관보다 더 큰일을 했냐”며 치하했다. 3권에는 학계 인사들이 쓴 논문, 나머지 4~7권에는 그의 삶을 기리는 글과 사진, 작품이 담겼다.
사업을 했던 허 선생은 치과의사였던 부인 박영숙(87)씨와 함께 우리나라 자수와 보자기의 아름다움에 눈떠 1960년대부터 이를 모으기 시작했다. 박씨는 “처음에는 우리도 도자기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가짜가 많았다. 뭘 수집해야 하나 고민할 때 (한국 민화 연구 개척자인) 조자룡 선생이 자수를 권해 모으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20년 전, 누군가 자수 작품을 싸온 보자기가 너무 아름다워 그때부터 보자기도 모으기 시작했다. 76년엔 한국자수박물관을 세웠다. 외국의 정상 부부가 오면 퍼스트레이디들이 이곳 한국자수박물관을 들르기도 해 민간외교관 역할도 했다.
운명을 예감한 것일까. 고인은 작고하기 일주일 전인 5월 17일 평생 모은 자수·보자기 컬렉션 5000점을 서울시에 기증했다. 국가지정 보물 제653호인 4폭 병풍 ‘자수사계분경도’와 국가민속문화재 3건도 포함됐다.
기증품은 서울 종로구 옛 풍문여고 자리에 건립 중인 서울공예박물관에서 앞으로 상설 전시된다.
손영옥 선임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