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정부가 대대적인 시위에 화들짝 놀라 ‘기름값 인상 유예’를 발표하면서 일단 급한 불은 껐다. 사치품 등 자산에 대한 부유세 폐지 정책도 철회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마크롱 정부에 대한 프랑스 서민들의 반감은 여전하다. 당장 이번 주말 다시 폭력 시위가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과격한 반정부 시위를 발화시킨 직접적인 원인은 유류세 인상 정책이다. 그러나 이면을 들여다보면 글로벌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정책에 대한 반작용과 반발이 원인(遠因)이라고 워싱턴포스트는 4일(현지시간) 지적했다. 온난화 등 급변하는 기후환경에 대응하고 지속가능한 삶의 질 영위를 위해 재래식 화석연료 사용을 자제하자는 취지에서 비롯된 기후변화 대책이 서민, 빈곤층의 삶을 직접 위협해 이들의 집단적 반발을 부른다는 얘기다.
실제로 ‘노란조끼’에 참여한 많은 프랑스 시민들은 기후변화 대응이라는 커다란 의제보다는 먹고살기 힘들다는 이유 때문에 거리로 나섰다. 박탈감이 커진 시민들은 유류세 인하 요구와 함께 부유세 폐지 철회도 요구해 왔다. 부유세는 1980년대 사회당 정부가 분배 정책의 주요 수단으로 도입한 세목이다. 130만 유로가 넘는 자산을 보유한 개인에게 부과됐지만, 마크롱 대통령이 지난해 사실상 이를 폐지했다. 이는 마크롱 대통령에게 ‘부자들의 대통령’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을 안겨준 계기가 됐다.
기후변화 정책에 대한 국민 저항은 프랑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캐나다 연방정부는 탄소세 부과 방침을 발표했지만 일부 주의 강력한 반대에 직면했다. 예정대로라면 탄소세 부과는 2019년부터 시작되지만, 온타리오주는 이 방침에 반대해 연방정부와 소송을 벌이고 있다. 캐롤라인 멀로니 온타리오주 법무장관은 “연방정부의 탄소세가 우리 가족의 주머니를 털어가고, 일자리 창출도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2015년 앨버타주에서도 탄소세 도입을 밀어붙였던 주총리가 낙마 직전까지 몰렸다.
미국 역시 마찬가지다. 서부 워싱턴주에선 지난달 이산화탄소 1t을 배출할 때마다 세금 15달러를 부과하고 매년 2달러씩 세금을 인상하는 탄소세법안이 발의됐다. 하지만 이 안은 주민투표에서 부결됐다. 독일에서도 극우정당을 중심으로 기후변화가 사기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이처럼 세계적으로 탄소세 부과, 기후변화 대응에 대한 반발이 이는 것은 기후변화가 일반 주민들의 생활을 어렵게 만들 만큼 가치 있는지에 대한 설득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월스트리트저널은 분석했다.
이런 움직임에는 이른바 ‘트럼프 효과(Trump effect)’도 한몫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대표적인 기후변화 대응 무용론자다. 미국은 트럼프 대통령 취임 5개월 뒤인 지난해 6월 파리기후변화협약(파리협정)을 탈퇴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노란조끼 시위도 파리협정과 연관시켜 비난하고 있다. 그는 4일 트위터에 “내 친구 마크롱과 파리 시위대가 내가 2년 전 도달한 결론에 합의해 기쁘다”고 썼다. 또 “파리협정은 책임 있는 국가에는 에너지 가격 인상을 불러오고 최악의 오염국에는 눈가림을 해주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면서 “미국 납세자와 노동자는 다른 나라의 오염물질을 치우는 데 돈을 낼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아일랜드의 싱크탱크 국제유럽문제연구소(IIEA)는 최근 보고서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파리협정 탈퇴 결정 이후 전 세계 기후변화 대응이 늦춰졌다고 주장했다. 러시아와 터키는 협정에 가입했지만 의회 비준은 차일피일 미루고 있고, 맬컴 턴불 호주 총리는 온실가스 배출 제한 법안을 도입하려다 역풍을 맞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브라질 대통령 당선자도 ‘파리협정 탈퇴, 아마존 보호 완화’를 선언했다.
미국의 파리협정 탈퇴는 각국의 신재생에너지 투자 감소도 불러왔다. 최근 1년 새 전 세계 투자은행 36곳은 석탄업체 투자를 6% 늘리면서 재생에너지 투자는 38% 줄였다.
미국이 각종 기후변화 관련 기금에 보내던 지원금을 삭감한 것도 각국의 기후변화 대응 속도가 늦춰진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보고서는 분석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30억 달러 녹색기후기금 지원 약속도 트럼프 대통령이 파기했다.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