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1100주년, 고려를 돌아보다] 서역 상인 누빈 개경은 국제도시… 남녀 성차별도 없어

경남 밀양에 있는 고려 후기 문신 박익(1332~1398)의 묘 벽화에는 남녀가 골고루 그려져 있다. 남자는 단령포에 가죽 장화를 신었다. 여자는 저고리와 치마에 화식관(花飾冠)을 썼다. 고려인의 옷과 장식은 화려하지 않다. 문화재청 제공
 
고려 시대 동전들. 문화재청 제공
 
경북 경주 괘릉의 무인상은 머리와 수염이 곱슬곱슬한 서역인의 모습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고려가요 ‘쌍화점’ 악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김기섭 부산대 사학과 교수


우리나라가 ‘코리아(Korea)’로 불린 것은 약 1000년 전인 고려 시대(918~1392)부터다. 고려를 드나들던 서역 상인들이 ‘고려’를 ‘꼬레아’라로 부르던 데서 한국의 영어 이름이 나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그만큼 고려는 국제화되고 개방적인 나라였다. 여성의 지위가 조선에 비해 훨씬 높았고, 문화적으로도 역동적인 다원사회였다.

고려는 개국 초, 각 지방호족에게 토성(土姓)을 나누어 주어 자기 지역을 다스리는 본관제를 시행했고, 지방관을 파견한 주현을 통해 다른 속현을 다스리는 독특한 지방 지배체제를 갖췄다. 고려는 전기에 노비안검법을 실시해 양인을 늘렸고, 과거제를 도입해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면서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 하지만 후기 권문세족의 수탈이 극심해지면서 새로운 세력에게 왕조를 내줬다.

김기섭(61) 부산대 사학과 교수를 최근 충남 아산 천안아산역에서 만나 고려의 경제·사회에 대해 들었다. 김 교수는 고려 시대를 연구하는 국내 유일의 학술단체인 한국중세사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고려 시대 토지제도 연구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김 교수는 천안박물관에서 고려사 관련 강의를 마치고 부산으로 돌아가기 전에 국민일보와 인터뷰를 가졌다.

-고려가 활발하게 무역을 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고려는 해상 세력이 중심이 돼 세운 나라였다. 태조 왕건의 집안은 경기만에 정착한 해상세력이었다. 수도 개경(지금의 개성)과 가까운 예성강 하류의 벽란도에는 아라비아, 페르시아, 로마 상인까지 와서 무역을 했다. 송나라 상인들도 빈번하게 왕래했다. 중국에 온 서역 상인들이 고려까지 오면서 한반도가 ‘꼬레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다.”

-통일신라 때부터 외국인이 많이 오지 않았나.

“그렇다. 통일신라 말 무장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해 당나라와 신라, 일본을 잇는 삼각 해상무역을 했다. 신라 향가 ‘처용가’의 처용이 아라비아인이라는 설도 있다. 신라 시대 유물에 이미 중동에서 수입한 물품들이 출토된다. 경주에 있는 괘릉의 무사상도 머리가 곱슬곱슬한 외국인의 모습이다. 신라 말에 이미 외국인이 이렇게 많았으니 이어지는 고려에는 더 많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 외국인이 얼마나 많이 활동했나.

“고려 전기 문서에 등장하는 관료만 30명이 넘는다. 고려 전기 문신 쌍기는 본래 후주(後周) 사람이었는데 고려에 귀화했다. 그는 958년 광종에게 과거제 설치를 건의했다. 이듬해 그의 부친 쌍철도 고려에 와서 좌승이라는 관직을 받았다. 송나라 온주 사람 주저는 1014년 과거를 주관하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었고, 외교문서를 주로 작성했다. 우리 성씨 중 연안 인씨는 1275년 몽골에서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를 따라왔던 인후가 귀화하면서 생겨났다.”

서역 상인이 개경을 누비고 생김새가 다른 이들이 요직을 차지하던 고려는 상당히 분방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가요 ‘쌍화점’ 첫 소절을 보자. “만두집에 만두 사러 갔더니만/ 회회 아비 내 손목을 쥐었어요./ …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 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 같이 답답한 곳 없다.” 가게에서 외간 남자가 여자의 손을 잡는 장면이다.

-고려 가요에는 ‘쌍화점’처럼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한 게 많은데 왜 그런가.

“기본적으로 고려는 남녀의 성차가 거의 없는 사회였다. 고려 호적을 보면 남녀를 출생 순서에 따라 기록하고 남성 호주(戶主)가 숨진 경우 여성이 호주가 됐다. 남편이 숨지면 재혼도 할 수 있었다. 친가와 외가를 동렬에 뒀다. 대규모 축제인 연등회나 팔관회 등에서 남녀가 만날 기회가 많고, 남녀가 내외하지 않고 동등하니까 연애도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조선 시대와 비교하면 분위기가 많이 다르다.

“조선은 15세기부터 ‘삼강행실도’ 등을 만들어 보급하는 등 유교적 윤리를 확산하기 위해 노력했고 삼강오륜에 따른 가부장적 질서가 강했다. 반면 고려는 유교 불교 도교 풍수지리 민간신앙 등이 유행하는 다원사회였다. 여성의 지위도 높았고 발언권도 셌다. 고려 후기 문신 박유가 고려 처녀들을 원나라 공녀(貢女)로 바치는 것을 막기 위해 1275년 첩제(妾制)를 건의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 주장에 대해 ‘저 자가 첩을 두는 것을 주장한다. 저런 자를 가만둬서 되겠냐’며 부녀자들이 들고일어났고, 재상 중 아내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적지 않아 논의가 중지됐을 정도였다.”

-고려 시대 여성의 지위를 보여주는 제도는 무엇이 있나.

“고려는 기본적으로 일부일처제였다. 부부의 이혼도 금기가 아니었다. 재혼도 개인의 의지에 따라 이뤄졌고, 특히 배우자와 사별 후 하는 재혼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고려 시대에는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가는 형태의 혼인도 많았다. 여성의 권한이 강했다고 볼 수 있다. 상속에 있어서도 아들과 딸 구분을 두지 않은 균분상속이었다.”

-조선 시대 유교 문화로 고려의 전통이 다 바뀐 것인가.

“조선 전기에만 해도 이런 고려의 전통이 남아 있었다. 율곡 이이의 어머니 신사임당(1504~1551)은 아들 대신 부모를 모시던 어머니 덕분에 외가인 강릉에서 나고 자랐다. 이런 분위기 덕에 신사임당의 셋째 아들 이이도 외가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조선 후기로 갈수록 유교의 영향으로 남존여비 사상이 널리 퍼졌다.”

-노비안검법은 어떤 역할을 했나.

“노비안검법은 원래 나말여초에 양인이었다가 노비가 된 사람을 조사해 양인으로 만들고자 하는 법이었다. 광종이 호족세력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국가에 세금을 내는 양인 신분의 공민이 늘어나기 때문에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할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광종은 개혁에 의지가 강한 왕이어서 과거제를 실시해 새로운 인재를 발굴했다.”

-고려가 토지 제도 때문에 쇠퇴한 것인가.

“고려 후기에 토지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했다. 땅을 많이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격차가 커진 것이다. 당시 권문세족이 토지를 탈점(奪占)하는 현상이 심했다. 강제로 남의 땅을 빼앗기도 하고, 타인의 수조지(收租地)를 마음대로 차지했다. 불교가 부패하면서 사찰도 백성들의 땅을 탈점했다. 통칭해서 사전(私田)의 문제라고 한다.”

-얼마나 수탈이 심했나.

“권문세족들이 불법적으로 땅을 늘려가니까 국가의 세수는 더 줄어들지 않았겠나. 나라는 모자란 세금을 거두기 위해 농민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거두게 되고, 농민들은 그 세금을 견디지 못하고 떠났다. 그 당시를 ‘십실구공(十室九空)’이라고 했다. 열 집 중 아홉 집이 빈 집이란 뜻이다. 농민들은 그렇게 토지를 떠나 권문세족의 농장에 들어가 노비가 됐다.”

-왕조의 흥망은 백성의 삶에 달린 것인가.

“중요한 부분이다.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흥사대부들은 이 수탈을 해결하기 위해 사전의 혁파를 주장했고 큰 지지를 받았다. 신흥사대부 안에서도 이색 등과 같은 온건개혁세력, 정도전 등과 같은 급진개혁세력으로 나뉘어졌다. 이색 등의 온건 세력은 사전 개혁에는 찬성했지만 역성혁명에는 반대했다. 그러나 결국 정도전 등의 급진개혁세력이 이성계와 함께 탄생시킨 나라가 조선이다.”

-우리가 고려 사회에서 배울 점이 있다면.

“고려는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포용적이고 개방적인 다원사회였다. 우리 사회는 남녀 혐오, 세대 갈등, 다문화가정 등 여러 가지 문제에 봉착해 있다. 이런 문제들은 기본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데서 온다. 열린 사회였던 고려처럼 서로를 존중하고 포용한다면 많은 갈등을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아산=글 강주화 기자, 사진 최종학 선임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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