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바삐 걸음을 옮기는 겨울 저녁,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의 한 연습실에 불이 환하게 켜진다.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를 연상케 하는 고풍스러운 의상에 색색 무도회 가면을 걸친 19명의 배우들. “마음껏 즐기세요.” 연출가가 시작을 알리면, 불이 꺼지고 피아노 선율이 연습실을 가득 채운다. 그리고 로미오는 저 멀리서 어둠을 헤치듯 무대 중앙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온다.
지난 4일 오후 8시,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에서 8일부터 이틀간 막을 올리는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연습 현장을 찾았다. 리허설을 하는 이들은 프로 배우가 아닌 시민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얼굴에는 실제 배우 못지않은 진지함이 어려 있었다.
‘로미오와 줄리엣’은 서울시극단(예술감독 김광보)이 운영하는 연극 체험 프로그램 ‘시민연극교실’ 10기 33명이 선보이는 공연이다. 올해 10주년이 된 시민연극교실은 2009년부터 지원자들을 받아 작품을 올려왔다.
지금껏 배우의 기회를 얻어 무대에 오른 일반인은 총 302명에 달한다. 작품들의 면면도 다양하다. ‘6호실’(안톤 체호프), ‘서민 귀족’(몰리에르), ‘변신’(이시원) 등 22개의 수준 높은 작품으로 관객들을 맞았다. 이번 10기는 두 팀으로 나뉘어 각각 가족 음악극 형식과 탭댄스 기반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선보인다.
고된 일을 마친 늦은 저녁, 회원들을 연습실로 향하게 한 열정은 무엇이었을까. ‘나의 삶, 나의 바람을 무대로’라는 공연의 타이틀처럼, 시민들이 무대 위로 가져온 이야기들은 다채로웠다.
줄리엣의 아버지 캐플릿 역을 맡은 김진(48·여)씨에게 이번 공연은 “후회를 털어내는 일”이었다. 출판업계에서 일한다는 그는 “고1 때 연극부원으로 무대에 한 번 올랐는데, 공연이 끝나자 ‘더 열심히 할걸’하는 아쉬움이 들었다”며 “30년이 지난 지금, 그때 가졌던 후회를 뒤집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지원했다”고 말했다.
큰 활력소가 된다는 회원도 있다. 로미오 역을 맡은 제약회사 연구원 김동건(31)씨는 “다른 누군가의 삶을 느껴보고 싶어 참가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 스스로 목표를 향해 온 힘으로 달려가고 있더라. 그런 나를 발견했을 때의 감동이 정말 컸다”고 설명했다.
“재수 끝에 시민연극교실에 합격했다”는 캐플릿 부인 역의 홍석연(49·여)씨도 그렇다. 고등학교 영어 교사인 그는 “학생들을 대할 땐 톤도 높이고, 표정도 밝아야 한다. 연기와 비슷한 점이 많다. 50대를 열어가는 기념으로 기쁘게 참여하고 있다”고 했다.
회원들은 체계적인 준비 과정을 거쳤다. 지난 7월부터 30번이 넘는 연기 훈련을 받으면서 기본기를 다졌다. 금배섭 안무가, 고연옥 극작가, 김현아 전 성균관대 연기예술학과 겸임교수 등이 강사로 참여했다. 이창직 김신기 등 서울시극단 소속 배우들은 직접 연출을 맡아 공연의 완성도를 높였다.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