힙합 음악은 하층민의 허언에서 시작됐다. 미국 뉴욕 빈민가 출신 래퍼들에게 부유함을 떠벌리는 가사는 팍팍한 삶을 잊게 해주는 그럴싸한 탈출구였다. 명품 옷과 장신구를 걸치고, 고가의 차를 몰며, 호화 저택에 산다는 과장은 래퍼들 사이에서 보편적인 소재가 됐다. 자신이 다른 래퍼들보다 훨씬 유능하고 잘나간다는 것을 호소하려고 거짓말을 했던 것이다.
신기하게도 많은 청취자는 이 유치한 공상을 재미있게 받아들였다. 어떤 래퍼는 노래가 히트하자 자신의 노랫말처럼 실제로 돈방석에 앉기도 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고무된 많은 래퍼들은 으리으리한 부를 과시하는, 상상의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한국에선 래퍼 도끼가 돈 자랑의 첨병이었다. 그는 근사하다는 뜻의 ‘일(ill)’과 백만장자라는 뜻의 ‘밀리어네어(millionaire)’를 조합한 ‘일리네어레코즈’를 설립한 2011년부터 꾸준히 부의 축적을 찬양하는 노래를 불렀다. 그의 노래에는 수십억을 벌었다는 얘기가 즐비하다.
불편함을 느끼는 이도 있었으나 젊은 세대는 대체로 도끼에게 열광했다. 어린 시절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았음에도 음악에만 매진한 결과 성공을 이뤘다는 서사를 지닌 까닭이다. 부모님의 재산에 따라 태어나는 순간 ‘흙수저’나 ‘금수저’로 계급이 정해지는 한국사회에서 출세 지상주의를 학습한 청소년들한테 자수성가한 도끼가 한없이 멋있어 보였을 것이다.
뜨거운 지지를 이끌어내던 패기만만한 돈 자랑에 얼마 전 뭇매가 가해졌다. 2002년 도끼의 어머니가 동창으로부터 1000여만원을 빌린 뒤 갚지 않았다는 피해자 가족의 폭로가 매체를 통해 보도된 다음부터였다. 도끼는 사건 당사자가 아니라서 변상할 법적 의무는 없다. 하지만 그는 SNS 라이브 방송을 통해 채무 이행을 회피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1000만원은 한 달 밥값밖에 안 되는 돈”이라고 거들먹거려 많은 이들의 반감을 샀다.
생각이 짧아도 너무 짧았다. 1000만원은 안정적으로 직장생활을 하는 이에게도 큰돈이다. 1000만원에 당장의 생계가 좌지우지되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도끼는 1000만원을 푼돈 취급하며 상대를 조롱했다. 채무자가 채권자를 찾아가 돈을 갚는 것이 마땅한데 도끼는 오히려 돈을 줄 테니 찾아오라고 했다. 그야말로 적반하장이었다. 유명하다는 이유로 거론된 것이 불쾌했다고 할지라도 그는 빌려준 돈을 돌려받지 못한 사람의 억울한 마음까지 헤아려 봤어야 했다.
도끼는 힙합이 태생적으로 지닌 습관성 허언을 반복함으로써 미국의 여러 래퍼들처럼 부자가 됐다. 황금만능주의는 이상을 현실로 만들어 줬다. 과거 그는 ‘일리네어 비긴스(1llionaire Begins)’ ‘핸즈 업(Handz Up)’ 등의 노래와 방송을 통해 컨테이너 박스에서 살던 과거를 밝힌 바 있다.
도끼가 큰 인기를 얻자 많은 래퍼가 같은 주제를 부르짖는 데 동참했다. 한국 힙합도 돈을 최고의 가치로 두며, 재물이 많음을 뽐내는 가사가 태반이 된 지 오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 역시 도끼처럼 부지불식간에 안하무인 허세만 키우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인격의 성숙을 내팽개친다면 힙합은 벼락부자를 갈망하는 양아치들의 집합소로 비칠 수밖에 없다.
<한동윤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