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계동서 20년 넘게 ‘왕진’ 다니는 장현재 원장 동행 취재기
“환자 1명을 방문해 진료하는데 오가는 것 포함 1∼2시간 걸려”
왕진 활성화법 국회 통과됐지만 충분한 보상 없으면 ‘회의적’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서 20년 넘게 파티마의원(건강검진 및 영상의학 전문)을 운영하고 있는 장현재 원장은 국내에서 몇 안 되는 ‘왕진(往診) 의사’다. 평소 의원을 다니던 환자나 노인 등 지역 주민이 거동이 힘들어 오지 못하는 상황이 생기면 왕진 가방을 꾸려 직접 집으로 찾아간다. 진료 환자가 많지 않은 요일이나 점심시간을 활용할 때도 있고 진료가 전부 끝난 후 짬을 내기도 한다. 지난달 26일 장 원장의 왕진 현장에 동행했다.
11시 40분쯤 오전 진료가 끝나자 장 원장이 익숙한 듯 검정색 왕진 가방에 청진기와 혈당계, 혈압계, 체온계, 알코올스펀지 등을 챙겨넣었다. 장 원장은 “월요일이라 환자가 다른 날보다 10여명 많았지만 왕진 가려고 서둘러 봤다”고 했다.
차로 20분쯤 달려 인근 아파트 박모(56·여)씨의 집을 찾았다. 박씨는 뇌수두증과 뇌출혈로 팔다리를 거의 쓰지 못해 10여년째 침상에서 누워 지내고 있었다. 오랜 와상(臥床)생활로 욕창과 감염, 폐렴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매일 요양보호사가 몸을 뒤집는 등 돌봄을 제공하고 방문간호사가 정기적으로 찾아와 전문 간호 서비스를 하지만, 의료적 처치가 필요할 땐 장 원장에게 왕진을 요청한다. 병원에 가려면 119나 사설 앰뷸런스를 불러야 해 비용이 만만치 않다. 이날 왕진은 방문간호사와 박씨 보호자의 요청으로 이뤄졌다.
대화가 힘든 박씨와 눈인사를 나눈 장 원장이 청진기를 가슴에 갖다 댔다. 김영미 가정방문간호사가 옆에서 건강체크를 도왔다. “심장과 폐는 이상 없네요. 혈당도 99로 이 시간대에는 정상이고. 혈압도 괜찮고.” 눈과 입안, 피부 상태도 꼼꼼히 살폈다. 요양보호사가 “욕창은 없고 간혹 손으로 얼굴을 할퀴어 손을 묶어놓을 때가 있다”고 했다. 장 원장이 간단한 진료를 마치고 요양보호사와 방문간호사에게 필요한 사항을 주문하고 나니 30여분이 훌쩍 지났다.
장 원장은 “오가는 시간까지 합쳐 환자 1명을 방문 진료하는데 1~2시간 걸린다. 거리가 멀면 더 소요된다”면서 “솔직히 병원 진료 의사가 1명 더 있어 가능한 일이지, 1인 개원 의사가 왕진을 나가기는 어려운 게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왕진하고 청구할 수 있는 급여비용(서비스 대가)은 일반 의원에서 받는 진찰비와 약간의 교통비 정도가 전부다.
중계동에는 서울의 마지막 달동네로 알려진 ‘백사마을(104번지)’이 있다. 주민들 상당수가 기초생활수급자로 거동이 불편한 노인이나 만성질환자들이 많다. 장 원장은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이 마을 초입에 개원하면서 연을 맺은 이후 지금까지 왕진을 다니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마을 주민치고 장 원장을 모르는 이가 없다. 장 원장은 “주민 대부분이 아주 급한 응급 상황이 아니면 병원에 가기 어렵고 간다 하더라도 별로 해 줄게 없다는 얘기를 듣는 사람들이어서 의사가 직접 찾아와 자신을 봐주는 것만으로도 아주 고마워한다”고 말했다.
빠른 고령화가 불러낸 왕진
장 원장처럼 왕진(방문 진료) 나가는 의사는 전국적으로 매우 찾기 힘들다. 불과 40년 전만 해도 묵직한 가죽가방을 손에 들고 왕진에 나서는 의사 모습은 주변에서 흔치않게 볼 수 있었다. 아픈 환자를 직접 찾아 돌보는 의사의 모습은 ‘인술의 상징’이었다. 왕진은 1970년대 말까지 성행했다. 하지만 응급시스템의 정착과 병원 내 진료를 기본으로 한 의료법 개정으로 점차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현행 의료법은 환자·보호자 요청에 의한 응급상황이나 부득이한 사정에 의한 경우에 한해 예외적으로 방문 진료를 허용하고 있다. 하지만 별도 보상이나 지원이 없는 상황에서 왕진 문화가 제대로 자리잡긴 힘들었다. 지금도 극히 일부 의사가 왕진을 나가고 있지만 ‘그 때 그 시절’과 비교하면 미미한 수준이다.
그런데 급속한 고령화와 1인가구 증가라는 시대적 요구가 왕년의 왕진을 다시 불러냈다. 지난해 65세 이상 노인의 건강보험 진료비는 처음으로 전체의 40%를 넘어섰다. 노인 의료비 감축이 국가 과제로 등장했다. 여기에 핵가족화로 노인이나 장애인, 아동 등 사회적 돌봄이 필요한 인구가 전국적으로 100만명에 달한다. 거동이 불편해 병원에 오지 못하는 취약계층의 경우 사실상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왕진이 이런 현실을 타개할 효과적 수단이며 보편적인 국민 건강권 확보에 기여할 수 있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한국 보다 앞서 초고령사회에 진입한 일본은 2015년부터 재택의료 활성화에 적극 나섰다. 일본 후생노동성의 2017년 재택의료 보고서에 따르면 환자가 입원하지 않고 집에서 진료·간호를 받을 경우 의료비 지출이 3분의 1수준으로 줄어드는 것으로 분석됐다. 일본에선 한해 약 1000만건(2015년 기준)의 진료행위가 집에서 이뤄진다. 일본 내 전체 의원(진료소)의 22.4%, 병원의 31.7%가 재택의료에 참여하고 있다. 일본은 나아가 올 4월부터 일본 전역에 24시간 왕진이 가능한 시스템을 구축했다.
프랑스와 미국 등에서도 왕진 문화가 일치감치 자리잡았다. 프랑스 1차의료기관(의원) 의사 업무의 15%는 방문진료가 차지한다. 미국은 노인의료보험제도인 메디케어(Medicare)에서 방문진료를 지원하고 있다.
뒤늦었지만 한국 정부도 최근 발표된 커뮤니티케어(지역사회돌봄서비스)추진 계획에 방문진료 활성화를 포함시켰다. 그간 낮게 책정돼 온 왕진 보상 수가를 상향 조정해 의사들의 왕진을 유도하기 위한 국민건강보험법 개정안도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보건복지부는 내년 상반기 중에 왕진 시범사업을 벌이고 2020년에 본격 제도화하겠다는 방침이다. 복지부 관계자는 10일 “왕진에 따른 건강보험 급여 기준과 적정한 수가 수준을 현재 마련 중에 있다”고 밝혔다.
한국형 왕진 모델 설계 중요
하지만 실제로 왕진 가방을 든 의사들을 지역사회에서 흔하게 접하기까지는 꽤 많은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왕진을 감으로써 다른 환자를 볼 수 있는 기회 상실에 따른 충분한 보상(왕진 수가)이 주어지지 않으면 의료기관의 참여를 이끌어내기 어려울 것이란 회의적 시각이 지배적이다.
고병수 일차의료보건학회 회장은 “왕진의 최일선에 서게 될 의원급 의료기간의 90% 이상이 원장 1명의 단독개원인 국내 현실에서 내원 환자 진료를 포기하고 왕진을 나가기란 쉽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는 “유럽과 미국 등 왕진이 정착된 나라의 경우 여러 명의 의사들이 함께 일하는 공동개원이 많아 왕진을 나가도 진료 공백이 생기지 않아 수익이 보전된다. 하지만 우리나라 여건상 보상이 충분히 따르지 않으면 단 시간에 왕진이 활성화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현재 의사가 왕진을 나가도 받을 수 있는 초진료는 1만5000원(의원급 기준) 수준이다. 고 회장은 “병원에서 하루 80~100명의 환자를 보고 최소 60만원의 수익이 생기는 구조인데, 왕진을 나가면 하루 3명 정도밖에 못본다. 그러면 한명 당 최소 20만원의 수가가 붙어야 할 것”이라면서 “정부가 그 정도 왕진 수가를 인정해 줄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왕진 대상 환자군과 방문진료 범위, 종합병원급 이상 큰 병원의 참여 여부에 대한 논의와 검토도 필요하다. 장현재 원장은 “지역민과 가까운 1차의료기관이 왕진을 맡는 게 바람직하고 종합병원 이상은 급성기 질환 치료나 의학 연구에 매진하도록 의료전달체계를 재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울러 왕진 나가서 발생할 의료사고에 따른 법적 책임과 환자 안전에 대한 대책 마련도 있어야 한다. 장 원장은 “정부와 의료계가 머리를 맞대 우리나라 환경에 맞는 한국형 왕진 모델을 설계하고 그로 인해 국민이 집에서 양질의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글·사진=민태원 기자 twmin@kmib.co.kr